허무 속의 그리스도

허무 속의 그리스도

 

-오용익 목사님의 글-

바람처럼

“역사란 양적으로 질을 규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재물이나 권세로써 성공 여부를 가름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으로는 세상 변화를 다 읽어낼 수가 없다. 이것은 진실도 모르면서 인생을 마감하려 하는 식이 된다. 곧 인간은 평생 오해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부패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이 움켜잡은 그것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이 움켜잡은 그것으로 인해 거기에 관련된 진실과 의미가 삭제되어 버린다. 이것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이다.”(교재4쪽)

 

때도 모른 채 살아오다 시간의 구조에 휩쓸려 말씀의 때를 만나다. 내 행동을 끌어 모아 나의 역사를 구성하려 고안한 우리의 때 크로노스가 때의 전부인 줄 알았다. 감춰진 시간구조의 빛을 쐬니 지상의 아이온과 카이로스가 흉측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살맛과 죽을 맛, 의와 죄, 천국과 지옥의 윗판과 밑판을 어떻게든 꿰매어 이게 나다, 이게 바로 내가 이룬 내 것이다, 하고 살아온 때 묻은 인생이면서도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그래서 나는 목사다, 나는 성도다, 하고 살았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면서 살았지 ‘나에게 덮쳐 와서 주님이 하시고 나타내는 일이 뭡니까’라는 질문을 뽑아낼 줄 추호도 몰랐다.

 

‘~하기, ~하기, ~하기……’ 이 뭉뚱그려진 시간의 공간화(아이온)에서 생명과도 같은 희망을 몽땅 걸고 행여 이제나 저제나(카이로스) 내 인생 언젠가 한번 대박난다는 숨차게 올라오는 기대에 하나님, 예수, 십자가, 성경의 모양새만 걸치고서 얼추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면 천국 가는 신앙이 되는 줄 알았다. 왜 허물어지는지도 모르면서 허물어지고 있으면서도, 죽으면 천국이야 가겠지, 라는 3차원 입체그림을 야무지게 그리고 있었다. 예루살렘 왕 전도자가 죽기 전에 허무라는 용어로 누비어진 계시를 준 것도 다 이 그림 예쁘게 그려서 하늘나라 오는데 이상 없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든 아이온이든 카이로스든 우리가 아는 모든 때는 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비상하는 활주로 같은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교회가, 목사가, 개혁주의가 난다 하는 인간들이 다 그렇게 가르쳤다. 그 내용은 이렇단다. ‘인생은 허무한 거니까 힘들게 번 돈 허무한데 쓰지 말고 허무하지 않은 좋은 일에 쓰게 나한테 가져오라고.’ 다른 말로 하면 “허무해서 당황하셨어요? 그럼 돈 내세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따먹기 절대 없기, 죄도 몰라서 아예 죄 짓기도 없기, 죄를 알지도 그래서 짓지도 못하는 인간이 건방지게 의를 만들어 하늘나라 오는 일은 일체 없기’를 품은 숨겨진 아이온의 사건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언약의 실험실에서 실험쥐처럼 내내 시달렸고 고통 해야 했다. 도대체 그 사건을 일으키는 숨어계신 주인공 외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도록 납작해지면서, 그리고 수많은 변곡점으로 산산이 토막 난 채 굴러가면서 이스라엘의 시간구조는 우리를 신에게 데려가는 매개가 아니라 도리어 그 어떤 시도마저 소용없게 하는 난폭한 주인이 되었다. 소용없다, 소용없다, 소용없다, 하는 운명의 교향곡 외에 다른 연주를 일체 못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시간구조의 군림, 그로 말미암은 언약단절, 이 깊은 허무를 어떻게 하나? 그 깊은 허무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왕은 전도서 계시를 전했고 그 계시의 내막이 이랬단다. 장차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자기 피의 실을 꿰어 위 아래로 누비는 바느질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언약의 그 밑판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계신다고.

 

수다를 많이 떨었다. 수다를 많이 들었다. 오랜 만에 만난 탓이다. 내 인생에 발생한 변곡점들, 당황이었고 슬픔이었고 허무였던 그 때 그 일들이 어느새 나의 긴 역사가 되어 과장 섞인 농담과 자랑 질로 나왔던 것이리라. 각색에 윤색에 덧칠에 또 덧칠한 무덤.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 무슨 죄를 알고 죄를 모르는 인간이 무슨 용서를 알까? 전도서의 계시를 전한 그 예루살렘 왕조차 실패한 언약, 어떤 인간도 소외 된 채 그 절대허무 속에 떨구어 버리고 그 허무 속에 몸소 찾아오셔서 자기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한 지혜께서 피 묻은 바늘로 깊숙하게 찔러서 허무의 밑판까지 나를 밀어 붙인 뒤 다시 끌어당겨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 이름에 접붙여 주시는 그 성령의 작업, 그 피 바늘의 천공작업의 반복 외에 다 소용없고 계속 소용없어야 한다. 절대용서가 와야 그 앞에서 절대 죄를 안다. 그것으로 그만 내 이름아, 그만 바람처럼 사라져다오. 내 인생이 허무한 게 아니다. “허무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세우고”(교재 6쪽) 이로써 언약 적 심판의 밑판이 마련된다. “지혜의 완결판이 ‘죽음+심판’이라는 말이다. 이 죽음에 예수님께서 동참하셨는데 그 죽음이 참 지혜 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교재 6쪽)

 

“하나님의 법의 주입이 죽음을 유발해서 온통 죽음의 환경 안에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교재 7쪽) 인 것을 누가 알아챌 수 있을까? 고생고생 하다가 잠시 웃다가 결국 늙어 죽는 “인생의 여정이 정해진 코스이며 이것이 지혜를 거쳐 언약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전 12:1-7)”(7쪽) 임을 어느 누가 순순히 수용할 수 있을까? “심판의 절정이 곧 구원”인 이 십자가를 위한 구원,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구원을 누가 원할까?

 

바람이 만든 인간 바람의 일부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게 인생이라지.(6쪽)

 

“말씀이 여기 있는데 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복음을 안다, 하는 자들은 참 많은데 정말 복음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보기가 힘들다.”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바람처럼 사는 동안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리고 이리저리 너풀거리면서 아리고 오래도록 그 말 때문에 아팠으면 좋겠다. 왜 복음은 들으면 그 때 뿐 바람처럼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바람처럼 살다가도 혹 성령의 바람이 불면 복음이 그리워 찾아들 바람의 자식들을 위하여 바람 같은 인생아, 시간이 많이 갔다. 벌써 바람처럼 9강이 올라왔구나. 바람처럼 녹취“하기.”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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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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