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질'
시편 속의 그리스도 마지막 강의 10강은 시편90:3절로 시작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인간이 스스로 존재의 주체 노릇을 해왔고
그 헛수고의 시절이 찾아들고 우리들의 헛것들은 '티끌'이 된다.
이 결과를 피할 위인은 없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다.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살았기에 서서히 소멸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가?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시90:5-10)
우리가 잠깐 풀이었고 꽃이었다가 소멸될 때 '주의 분내심'에 놀란다는 것이다.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 것 같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조롱이다.
우리를 한낮 마른풀로 만드는 세월의 칼이다.
하나님의 시원한 판정을 받아들이자.
이것의 형태는 '인간 무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외형적 조치라고 가르친다.
시편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하나님의 원수를 색출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시는 일이다.
세상에 있는 악마들로 하여금 절망감을 안겨 주는 일이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정체를 다 드러낼 때까지 주께서는 계속 일하신다.
바로 그 작업 자체가 '천국'이다.
무엇이 원수인가를 표면화 시키는 작업이다.
주께서 주님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일, 시편의 전체 내용이 이런 내용이다.
우리가 사는 것이 고되고 힘들지만 살아야할 이유, 우리가 목적을 내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언약의 성실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의 내막을 알게 한다.
시편28:5절을 빌어 결론하기를, 하나님은 파괴와 심판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고맙다'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죄'에 대해서 일체의 타협이나 양보나 흥정이 없는, 거룩과 정의로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에서 찾는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를 짓밟게 되면 닫혔던 문들이 열린다.(시24:7-10)
친히 들어가실 문들을 열여젖히시는 영광과 승리의 주님,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위로다.
시편90:17, 주의 은총이 우리의 행함을 지배하게 해달라는 기도: 우리의 행함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의 결실을 구하는 기도다.
시편94:9 "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귀가 우리 자아를 소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소유하는 것으로서 살아가라는 충고다(시94:9).
예수 안에서만 성립되는 상황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생각의 허무함을 아시니(11절)
감사란 이런 형편을 수용할 때, 허무를 수용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하나님은 일체 우리의 요구대로 일하시지 않으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나의 어리석음을 뭉게시는 하나님!
오직 십자가 피 앞에서만 자신의 죄와 허무를 알게 된 정상적인 상태로 가동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계였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성도는 '자기 일' '자기를 위한 일'인양 오해하지 말고
스펀지로서 족한 줄 알라는 사도의 충고요 저자의 충고다.
시편103편15-16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이것이 지혜다: 세월 속에서 원치 않는 '나'를 바라보는 일.
때론 나를 보면서 '누구세요?'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붙잡고 살면서 허탈을 느낀다.
이럴 때 시편 107편:12절을 주신다.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스스로 연출한 것은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배설물 같은 것들이다. 육체의 향연이다. 화장실에서나 어울린다.
지상의 모든 변화는 '중심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그 중심축이 '언약'이며 중심축의 진동은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온 인류가 언약을 표현하는 무대 장치로 동원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 전 과정이 요한계시록 진행 상태다.
시편119편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주시는 것도 나 잘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생생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망할까봐 두려워하지만(시편119:75) 우리는 망해야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늘 새롭게 이해 된다.
특히 '망해도 안 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
그 이해조차 성령을 톻하지 않으면 이해 할 수 없는 것.
온 천하가 성도를 돕고 있다.
산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물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는 일에 철저하게 동원되는 것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저자의 말에
성도는 어떻게 동의할까? (시편121:1-2)
바벨론 제국은(시편137편) 자신이 당할 처참한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셈이다.
유대 백성에게 가하는 학대는 자신이 자신에게 당하는 학대를 재현한 것이다.
누가,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세상이 예수님을 손찌검했던 그들의 손은 곧 당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손 역할이다.(시137:8-9)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반복해서 비현실로 몰아가는 것(시142:5-7),
성도는 악의 힘을 자력으로 이겨낼 수가 없다는 성령받은 자의 고백.
시146: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란다.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만 성립되는 '찬양'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잊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복' 자체란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저자의 이런 표현에 아멘한다.
나 자신을 잊은 자의 기도는 스데반 집사의 기도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골1:16)
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거짓없이, 사도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가?
인간은 결코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고 '나 중심의 구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살이 남으로써 예수님의 행하심에 찬양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성도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는데......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면서 덮쳐진 '하나님의 의'가 발생한 자리 "십자가 안"에서만 성도는 할렐루야 찬양하며
다윗의 레위지파 중심으로 찬양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천국 자체가 찬양대라는 뜻이란다.
다윗 언약이 임하는 현장은 이처럼 찬양이 울려 나오는 것이요 오직 '주의 이름'만 높이는 현장이다.(대하14:11)
이것이 주님의 현존이다.(엡5:18-20)
여호와의 문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조성되는 '시온성'과 더불어 나타난다.
다윗 언약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달성되었기에 시온성의 주인도 '주의 이름'이다.
인간이 아무리 성실해도 다윗 언약을 성취핸 낼 수 없다는 말이고 사람의 손은 곧 더럽다는 다른 표현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문은 핍박의 대상이었다.
이제 그 핍박이 복수로 바뀔 날이 오게 되는데 그날이 곧 세상 최후의 순간이요 심판받는 날이요 저주의 날이다.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24:7)
세상과 더불어 더러움으로 물든 하늘과 땅도 그 소임을 다했기에 불에 타서 소실되어야 한다(벧후3:10) (계21:1).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요6:65)
이런 기적 앞에서 과연 당신은 예수님이 자신의 전부가 되고 있는지?
이근호 목사, [시편 속의 그리스도]- 10강 '사람의 본질'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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