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하나님 되기 싫은 예수님

인간의 하나님 되기 싫은 예수님


멍멍 개(Dog)의 하나님만 되고픈 예수님 (인간의 하나님이 되기 싫어하시는 딴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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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선악이 된 하나님이 된 인간)의 하나님이 되기 싫고, 예수님(죄인:십자가의 긍휼)의 하나님만 되고픈 하나님


2011년 6월 10일 금요일 오후 3:33:57 김대식



(막 7:24,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5, 개역)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막 7:26, 개역)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30, 개역)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막 7:3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막 7:32, 개역)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33, 개역)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막 7:34, 개역)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막 7:35, 개역)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막 7:36,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막 7:37, 개역)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지난 시간에 시형제결혼법으로 인간의 율법지킴은 도리어 율법어김을 유발케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 지키지 마세요. 말씀을 지켰다가는 도리어 말씀을 어기는 그 굴레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를 지켰다가는 또 어떻게 될까요? 안지켰다는 이유로 정죄받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헷갈린다.


헷갈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과 일치할려는 그 자체가 죄악임을
예수님의 말씀 지킴 때문에 발각당합니다. 그 발각당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 쪽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시형제결혼법에 올무 걸어놓고
시아버지 유다는 지킬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며느리 다말이 이 시형제결혼법을 완성하는데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율법으로써 완성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그 법을 깨뜨리고
시아버지결혼법으로써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율법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법 지킴일 뿐인 행함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아닌 율법 외의 한 의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니 그것이 사랑입니다.
즉 막힌 담을 찢는 휘장을 찢지 않는 방식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 휘장을 찢는 방식이 십자가방식이라는 배신이미지입니다.


이 배신이란 누구와 짝이 되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짝이 된 자는 배신이미지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짝이 되지 않은 자는 속임수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고수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란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바깥문제가 아니라 내부문제)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것의 충돌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니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이 단 하나의 하나님으로써 믿는 하나님이고
이사야의 하나님은 이사야 딸랑 혼자만 믿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이 양상이 유대인과 예수님의 대립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임마누엘로써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서 잇고 전통을 지키는 방식이 유대인의 하나님 방식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방식은 도리어 그것을 깨뜨려서 이중분절화 시켜서 두 개로 차이를 내는 방식으로써의 하나님을 외치니


한 쪽은 그냥 하나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 곧 두 개의 하나님으로써 저들과 차이를 내는 방식으로써의(이중분절) 하나님을 외치니


서로 서로 우상이라고 서로를 정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한번 볼까요? 다윗은 두 개의 주가 있습니다.
두 개 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라
저들이 한 개의 하나님을 주장하니까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의 의미로써
주를 이중분절시켜 버리니까 상대적으로 두 개의 주 개념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이 비로소 알게된 두 주 곧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성령으로 감동하여 부르게 된 주를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두 조각이 내는데


한 쪽은 거짓선지자(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잇는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하는 법이 없고 구원이다 라는 주장)
한 쪽은 참선지자(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다윗이 안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만을 주장하여 이스라엘의 심판성만 주장) 로 나누어짐으로써 인해서 두 개로 나누어 집니다.


백성들은 과연 어느편에 설까요? 백이면 백 다수에 섭니다.
아무리 소수에 서고 싶어도
소수 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딸랑 한 명 뿐이기에
한 명만 세우실 정도로 주 께서 내 주께의 방식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 어떤 이스라엘 백성도 이사야 딸랑 혼자만 외치는 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 같다 라는 말씀이 성취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 스스로 이루지 여기에 인간의 믿음이 보탬이 될 수가 없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구체화 합니다.
아무도 멸망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인데 말이죠.


어 어 어 그런데 하나님이 저 딸랑 혼자만 외치는 이사야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성이 없는 구원은 거짓 구원입니다.


결국 이것은 배신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을 배신한 이미지가 형성이 되어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수해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선악의 형상이니까 우상의 형상입니다.



오늘날 현대에도 동일하게 보면 됩니다.


교회 다니면 지옥갑니다.
실컷 교회 다녀놓고 지옥가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 다니면 지옥 안가겠네? 천만의 말씀


교회 다니면 지옥갑니다. 그러나 교회가 되면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기는 모든 사람이 실천가능한 일입니다. 곧 행할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교회 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곧 교회 다니기는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주 만 믿겠다는 행함의 문제입니다. 그럼 하나만 믿지 두 개를 믿냐?


두 개 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중분절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배신의 이미지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을 쳐서 두 개의 하나님이 이중분절화 됨으로써
앞의 하나의 하나님과 뒤의 이중분절된 하나님과의 차이성을 드러냈다 라는 취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성령으로 인한 고백입니다.


동시에 다윗도 이 두 주께 라는 의미 때문에 즉 이중분절 때문에
다윗도 이중분절이 됩니다.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행 2:25, 개역)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6, 개역)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행 2:27, 개역)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8, 개역)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 개역)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리라 라고 하셨을때에 그 원수가 발등상 곧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원수가 성전이네? 라는 말이 아니라. 원수였던 자가 성전 곧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원수 개념이 없는 자는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냥 언급하지 않고 꼭 음부 개념을 집어넣어서 교회를 언급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라고 말이죠.
만약 음부를 곧 지옥을 붙여보니 지옥이 이겨버리고 교회가 지는 것을 보아하니 가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의인인지 아닌지를 죽여보면 안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다시살면 의인이고 다시 못 살면 가짜였다는 거죠. 이 방식이 과연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자에게 허용이 될까요? 그래서 허용이 안되는 집단이 바로 선악의 하나님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하나님이고. 그 속에서 빼내임을 당한자가 생명나무의 하나님을 믿는 두 하나님을 다 거치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다윗 자기자신입니다.


다윗은 이 원수개념을 거치지 않아버렸다면 기존의 이스라엘사람들이 믿는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을 믿으니 저런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쫏겨다니면서 이스라엘로부터 도망자신세로 주님께 간구하는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믿는자가 믿는자를 핍박하는 구조
이것을 다윗은 격게 됨으로써 원수가 바로 자신임을 시편에서 드러냅니다.
그래야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의미가 나옵니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는 딴 하나님을 이스라엘 속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선악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속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법의 하나님 (하나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속에서 은혜의 하나님인 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임마누엘이 나올수 없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
딴 하나님을 곧 차이성 곧 이중분절을 격음으로써 이사야는 본격적으로 남이 아닌 이스라엘을 두 패로 조각내는 심판을 증거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본적도 없는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얼굴을 이스라엘 중에서 뵌 이사야의 하나님이


두 하나님이 충돌 합니다.


두 하나님의 전쟁터입니다.


그 원수가 딴 하나님의 발아래에 둘때까지 다윗은 우편에 앉게 되는 겁니다.


그럼 다윗이 그 다윗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원수라는 의미로 이미 고정이 되었습니다.
그럼 누가 우편에 앉는 겁니까?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중분절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을 이중분절시킨 그 계통으로 오시는 분이 우편에 앉는 겁니다.


그럼 우편은 곧 창조가 선악의 방식이 아니라 율법의 방식이 아니라.
은혜의 방식이였다는 겁니다. 행함의 방식이 아닌 믿음의 방식으로 지으신바 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의 방식은 오로지 누구만을 보란 듯이 할까요?


마귀입니다. 선악을 따먹은 주동세력이 마귀이기 떄문입니다. 그 선악의 하나님을 뽑아낼줄 모르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이 가짜만을 향하여 저가 선하면 일부러 악하고
저가 악하면 일부러 선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반대의 방식
부정의 부정의 방식으로써만 벌어지는 전쟁이 바로 임마누엘 전쟁입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 되는 비방받는 표적이라고
그냥 표적이 아니라 비방받는 표적이라고 그것도 아기를 안고 선포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곧 유대는 두 조각 납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이 과거에 나누어지는 이유 또한 미리 보여준 예고편인 겁니다.
남유다로 남아본들 소용 없습니다. 또 다시 이중분절 됩니다.
반드시 유대인 손에서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이중분절 하겠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스스로 쳐서 이중분절 해서 딴 하나님이 되겠다는
하나님의 배신입니다.


그럼 누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하나님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니도 끼여주마 하고 인간이 믿어대는 하나님 속에서 빼내서? 예수님의 하나님만 되시겠다는 그 약속 속에 아무것도 한 것이 꼽사리로 끼여든 자가 바로 다윗이라는 겁니다.


아브람이 믿기에 기똥찬 하나님 아니라 그 속에서 빼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이 아브람으로부터 이중분절이 되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약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아브라함을 부러워한 죄용서 받은자의 행복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로마서 4장)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욥은 알수 없는 고통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괜히  괜~~~히 두루두루 돌아다니고 있는 마귀를 불러내서 괜히 ~~~ 괜 ~~~~~히 시비 붙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당연히 하나님이 줘서 그렇지 하나님이 안 주면 그도 원망할겁니다 라는
마귀의 선악을 뽑아내어서 그 마귀의 선악과 욥의 은혜성 곧 약속성과 싸움을 붙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래등 싸움인 하나님과 마귀의 내기 싸움에 새우꼴로 등터지는 것입니다.


그 새우 등이 터지는 그 사이로 새로운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식이 약속입니다.
그것을 몇 년전에 수련회 강의에서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을 이중분절시키는 방식으로써 이근호목사님이 강의를 했습니다.


동시에 욥도 나는 매일 가짜입니다. 즉 나는 엘로힘의 하나님으로 인한 가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곧 주께서 내 주께의 하나님으로 인한 가짜(원수=죄인)임을 우편에 앉히심으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욥은 나 보다 나라는 가짜도 견디기 힘든 이 고난을
저 알수 없는 분이 당하는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도대체 뉘신지요?
입을 막고 머리를 박고 그 분의 얼굴을 보고서
화로다 화로다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 라고
그 심판성이 구원임을 외치는 것이
바로 욥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죄인 원수 만들지 못하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요 그것은 엘로힘 욥의 3친구나
교회다니기만 하는 지옥갈자들이나 아브람이거나 이런자들의 선악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다윗은 베드로는 내가 믿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줄 아는 내가 충분히 사랑이 가능한 그런 하나님 그런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내쪽에서의 사랑을 죽은자 취급해서


주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두 하나님과의 차이성 곧 이중분절화 해서


예수님 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산자의 하나님이 되셔서
베드로를 찾아와 건져내는 사랑만이 바로 참 사람임을


베드로는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는
사단아 라는 지적, 원수다 라는 지적(다윗),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지적(바울)
나는 매일 매일 가짜입니다 라는 지적(욥)을 거쳐서 찾아오시는 예수님만이 참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는 방식이 바로 성령(희년) 곧 주의 주 되심의 약속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것만이 아예 시기가 나라꼬 걍퍅함이 일어나라꼬 일부러 보란 듯이 벌리는 것입니다.
바로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마귀가 시기 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주의 주 되심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목사들한테 속으면 안됩니다. 전혀 마귀가 시기하는 것은 언급할줄을 모르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때우고 일치성으로 떄우지 차이성이 뭔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야 또 늦게 본문에 들어갑니다. 이 차이내는 이중분절의 하나님을 저쪽 하나님과 이쪽 하나님을 갈라내는 구별성 차이성 분리성 나누임성이 바로 예수님의 일하심이요
마귀가 시기하고 방해하는 방식입니다. 마귀가 방해하고 싶지 않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안과 밖을 뒤엎어버렸습니다. 밖이 안이 되고 안이 밖이 되어버렸습니다.
자 이렇게 하니까
저들의 하나님이 가짜였고 반대로 예수님은 진짜로써 가짜의 시기대상 살인대상이 되는 겁니다. 경계대상 1호 말입니다. 뒤바꿔치기를 했으니 거룩의 1인자였던 바리새인이 졸지에 가장 더러운 악마가 되어버렸으니 바리새인의 하나님이 뭐가 됩니까? 마귀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방식인 십자가의 방식 곧 부정성이 아니면
바리새인의 하나님 곧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마귀인줄 꿈에도 모르는 겁니다.
선악의 배후에는 항상 마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벗겨지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자 그러니 저들이 말씀을 지키는 이유가 있지요? 장로들의 유전을 그 전통을 잇는 이유가 있지요? 괜히 손 씻는 거룩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마귀를 유지하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일하심의 배경화면이 되니 잘된 겁니다.
인간은 이런 예수님의 지적이 아니면 그 속에서 빠져나올길이 없는 겁니다.


오늘도 사건을 통해서 두 하나님으로 갈라집니다. 항상 이중분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로보기에 아따 성질이 급해 발음이 꼬이네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더러운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옵니다.
예수님은 그냥 고쳐주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차이를 내시는 이중분절이라는 사건을 벌리십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깜짝 놀랄발언을 하십니다.


또 다시 이중분절이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맛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그래야 교회 다니기 속에서 교회 다니기가 깨지고 교회되기로 주님이 벌리시는 창조를 맛보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피조물이 되었도다 라는 이전 것과 새것의 차이성을 누리는 겁니다. 교회다니기가 아니라 교회되기로써 말이죠, 교회되기는 내 숙제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숙제를 완료로써 당하는 누림을 격는 겁니다. 그런 설레임으로 다가갑니다. 그것에 제일 방해꾼이 바로 인간입니다. 나 라는 자아 라는 원수입니다. 인간은 모조리 방해꾼입니다. 그러니 더욱더 신나는 겁니다. 아 주님이 하시는 것 맞네 라는 거죠. 돌아서면 꼭 내 자랑이 나오게 되니 그 순간 제명이 되어야하는 것이 마땅하니까 말이죠.


교회가 나보고 나가라고 공갈협박해도 그딴거 별거아닙니다. 십자가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큰일인 겁니다. 어제까지 예수 잘 믿어도 소용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를 또 주님 자신을 이중분절 시키시는 그 쪼개짐 나누어짐의 사건이 없으면 오늘 헛 산 겁니다.


아예 예수님으로부터 제명이 된 개같은 이방여자에게 넌 이미 짤린 인간이잖아 라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굴욕감 모멸감을 안겨주는 발언을 하십니다.
좀 의아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과연 그 사람 밟을려고 한 것입니까?
그렇다고 안 밟을려고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진짜 예수님의 모습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약속 뿐입니다. 고쳐주는 기적 따위에도 관심 없습니다.
개같은 이방인이든 거룩한 주님의 자녀든 둘 다 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조리 이전의 것에 해당 됩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어쨌던 저쨋던 그 이전의 것을 이중분절화 시켜서 새피조물로 만드는
창조라는 이중분절의 약속을 벌리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채서 차이내는 나누이시는 창조를 벌리시는 겁니다. 교회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으로써 나누어지는 재미는 누리는 목적이 교회이지
교회다니기는 백날 천날 해본들 음부의 권세와 나누어지는 것이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은 마귀 속에
늑대 속에 양을 집어 넣습니다.
우우우 하고 양 잡아먹을려고 늑대의 온 몸이 쭈삣 쭈삣 뾰족하게 천개의 고원처럼 쏫아나서 지층을 이루는 겁니다. 마늘먹고 인간될려다가 예수님 떄문에 파토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 그것도 유대인의 하나님을 잘 믿어서 거룩해 질려다가
예수님의 손 씻지 않고 먹는 것 때문에 파토가 나는 겁니다.
곰이 마늘먹고 인간될려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마귀가 거룩한 삶을 실천하고 율법을 지키는 거룩을 행해본들 마귀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해도
예수님이 그 꼴을 못 봅니다. 파토 냅니다.
천국길 뚫을려고 바벨탑을 아무리 높이 정성스럽게 세우고 쌓고 천일 만일 동안 해도
주님은 흩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믿어대는 하나님과 그런 하나님을 흩어버리는 하나님의 싸움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서 임마누엘이라는 두 하나님의 차이성을 증거합니다.
자 그러면 누가 반드시 반발합니까?
반발하면 약속이 제대로 선포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야 당연히 바리새인입니다. 본문구절에서는 계속해서 누구 싫어하라고 아예 더러운 짖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거룩하게 손 씻는 장로의 유전을 쫏는 바리새인 말입니다.


그 더러운 짖을 어디까지 확대하는고 하니 8장 9장 계속 됩니다. 마가복음은 이 더러움의 부정의 확장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계속해서 연결 됩니다. 잇기가 됩니다. 두 패로 나누이는 그 기능이 계속 계속 증식 확장 됩니다.


나중에 8장에서도 다루겠지만 자 그렇다면 반드시 누구도 따라 붙습니까? 당대의 가장 의로운 거룩한 자 바리새인도 피장파장으로 따라붙으면서 끝까지 방해를 합니다.


이 두 싸움이 주고 받고 주고 받고 계속 끝까지 갑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다시 그 부정한 더러운 십자가가의 약속이 계속 퍼지듯이


귀신 씌인냥 바리새인 또한 끝까지 그 걍퍅함을 계속 계속 따라붙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수님이 괜히 세우신게 아니거든요?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걍퍅케 하시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할 순간에 여호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애굽왕 바로를 걍퍅케 해서 그 애굽군사들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실려고 하시듯이 말이죠.


똑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사도때도 그렇고
심지어 그 연속성은 지금도 동일하게 벌어지는 겁니다.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은
동시에 누구에게는 강퍅함을 부으셨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벌리신 감사한 일인데
바깥에서 울부짖으면서 억울한일 당했다고 복수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주님이 일을 참 제대로 하셨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그저 이런 개 에게도 부쓰러기 주신다는 것은
개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부쓰러기 양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먹고 살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주인과 차이나시는 주인이 있다 라는 그 주인의 영광이


왜 저들 유대인에게는 없고


이 개 같은 이방여자 더럽다 라는 특징 즉 지난주 더럽다 라는 것을 거룩의 이중분절로써 뽑아내시는 그 더럽다는 특이성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포기하시고(이중분절하시고)
이 개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선언이


이 여인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겁니다.


의인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포기하시고 죄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이 선언이


부정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이 선언이


졸지에 창조의 재편성 재배치 재창조 곧 심판성으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자 이것을 뚫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뚫었다 라는 것은


찢었다 라는 겁니다. 이 찢었다 라는 것은 휘장을 찢어서 막힌 담을 헐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우상을 헌 것입니다. 우상을 헐지 않고서는 화평이 없습니다.
막힌 담을 헐지 않고서는 소통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교통 즉 십자가 라는 부정함의 영, 십자가의 영으로써 교통만이


구원이라는 뿔로 뚫어버리는 겁니다. 모든 의문은 찢어지고 뚫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수로보니게의 딸 고침의 연이어 나오는
입과 귀가 고장난 귀는 막히고 입은 어눌한
귀머거리 벙어리를 동시에 가진 더러운 죄인을


뚫어버립니다. 막힌 것을 뚫고
어눌한 입을 풀어서 말을 할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리다 라는 에바다입니다.


난 에바다 에바다 카길래 에바다 운동? 흔히 사회약자들 장애인들 노동자들 소외계층들의 운동 구호로써 자주 들었는데


정작 성경에서는 에바다가 열려라 라는 겁니다.


뚫혔다 라는 의미입니다.


뭐를? 막힌 담을 말이죠,


휘장을 찢을때에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인


주님이 인자로 오셔서 휘장을 찢으심으로써 주님이 열린길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바깥의 주님이 들어오실려고 해도


안 쪽에서 그 휘장을 찢을 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직접 오셔야 하는 겁니다.


쌍둥이 개념이 인자라고 한 이유가 인자로써 오시는 겁니다.


두 주님이 그래서 다윗은 보게 되고


한 주님은 찢는 자가 없는 주님이니 인간들이 잘 믿어대는 선악의 하나님이니 가짜죠,
가짜라는 말은 가짜라서 가짜가 아니라. 진짜와 와 버림으로써 상대적으로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가짜 속에 있었었음을 보여주고 그 속에 있다가 빼내임 뽑아져 차이내는 나누임이 벌어지는 새창조를 격음으로써 당해버렸으니 저쪽은 그게 없으니 가짜가 된것일 뿐인 겁니다.


이 빼내임을 저번에 마이너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소수 비주류 라는 부정성이다는 겁니다.
상대적인 주류라는 긍정성에 반대로써 말입니다.


이 빼내시기 사건이 바로 열려라 라는 낙랑공주가 아군의 자명고를 찢는
기생라함의 거짓말과 같은 기능이 바로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기능 주 되심의 기능인 겁니다.
(즉 단순히 귀와 입을 열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죄악을 다 멸절시킴으로써 주어진 하나의 전리품이 열림이지 그냥 열어주지 않습니다. 애굽을 10번 재앙으로 무릎꿇도록 하지 않고 반드시 힘내도록 해서 다시 일어나 반드시 끝까지 따라와서 홍해를 가른 그 길까지 바짝 따라오도록 해서 죽여버리는 그 잔인하고도 잔인한 질투로써 애굽왕바로왕의 걍퍅함을 끝까지 활용하시는 그 악함을 확실하게 밟아버리는 구멍 뻥뻥 뚫는 그 뚫림 속에서의 열려줌의 의미 이기에 항상 상대적인 겁니다. 우리는 그냥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복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누구는 심판했고 다른 누구는 상대적으로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누구 보란 듯이 라는 상대적인 의미인 겁니다. 약속이 그러합니다. 창조 자체가 그러합니다. 여기에 힐문할 자 없습니다. 토기는 토기일 뿐 토기장이가 아닙니다.)


오늘 제목을 개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멍멍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우기는 그 인간들과 차이나는 졸지에 개가 될 수 밖에 없는 개
그럼에도 그런 개에게 주인이 되겠다고 온 그 주인이 개는 놓칠수가 없다고 외침으로써
소통 곧 하나 임을 개의 고백으로써 저들 보란 듯이 코 앞에서 그 부정한 짖꺼리만을 차이내시면서 하시는 겁니다. (시형제결혼법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시아버지결혼법이라는 부정성을 이루십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기에)


이것이 열려라 라는 에바다 방식입니다.


오로지 부정적인 십자가 만이  유일한 소통 열림의 방식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주의 주 되심을 주님 스스로 이루시기 위해서
늘 십자가라는 부정함으로써 주님 자신을 치셔서 그 허리에 나온 피로써
우리의 부정함을 씻기셨습니다.


우리도 늘 많은 사람 다수가 믿는 하나님으로 인해 별 탈 없이 지내고픈 그런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파토내시고


늘 그 속에서 빼내시고 차이내시고 나누이시고 분리시키시고 하시는 그 사건으로 인해


주의 주 되심을 보고서 주님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마귀보란들이 벌리시는 주님의 주 되심 앞에
전혀 마귀가 시기치 않는 인간의 하나님 믿기에서 그 행함 속에서


우리들을 그 속에서 건쳐주시는 출애굽의 사건을 출예루살렘의 사건을
출교회사건을 십자가 사건을 벌려주시옵소서


그 십자가의 저주를 거두지 마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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