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십자가

본문 : 누가복음 14: 25-35 제목 : 소유와 십자가 ‘소유를 버리는 것’이 마치 구원을 얻을 만한 요소를 ‘소유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책 없는 일은 결국에는 파멸로 이어지니 ‘대책 있음’을 “소유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요구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소유를 버리라’니 이러한 말씀의 취지를 어떻게 정리 정돈해야 할까요? 그것은 27절의 말씀에서 나온 해설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7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서 ‘십자가’란 우리 개인의 아이디어에서 사적으로 만들어내는 체험이 아닙니다. 공통된 체험으로서 공통적으로

약속의 자녀

로마서 9:6-12 약속의 자녀 ‘약속’으로 구원된다는 말은, 일체 인간의 의도가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고 고통이 없이 영원히 살고 싶어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당연히 지옥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현재 사람들이 지옥하고 있음을 알려주려고 애 쓰십니다. 하지만 지옥행에서 방향을 틀 재주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지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는 여전히 그 인간을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검은 능력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인간에 의해서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우리교회 3월 7일 주보 요약 - 이근호 목사《 설교 요약 》 2010년 3월 7 일〈 지난 주 설교 요약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족보가 하나님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안에 꼬챙이로 꿰인 자들만이 생명이 관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족보와 역사를 갖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데 자기 역사와 족보는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날, 다 끊어지고 허무하게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이 이미 구상해놓은 세상에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번 주 설교 요약 〉본문 : 누가복음 4:1-4 제목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사람은 평생토록 각가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죄의 소원

죄의 소원2011년 7월 7일 목요일 오전 7:59:05 김대식(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인의 제사, 형 에서, 그리고 사울 왕 등등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선하다 라는 겁니다. 착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잘 할려는 자세.정말 정성을 다하여서 제사를 잘 드렸다는 점입니다.대립된 인물들 거론해 보면 거의 다 그런식입니다.또 누가 있을까요? 두 아들 비유에서의 탕자의 형 맏아들 도 그러하구요. 참 착해요.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아무리 선한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어도 정작죄의 소원을 넘지 못하더라

무슨 말 하리요...

의존교회 강의(억지)를 듣고 제 좁은 마음에 태풍이 들이 닥쳐 속이 뒤집어지고 파헤쳐저 버렸던 것 같습니다.2부 강의 중간 즈음 로마서 8:31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그 부분 이후 마치 얼음덩어리를 작은 바늘로 콕! 쳐버린듯한...로마서 8:1~9장까지 말씀을 강의후 읽어 보며, 그 얼음덩어리 쫘악 깨져버립니다.9:20 -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냐 말하겠느뇨아! 무슨 말 하리요...로마서 9:16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이부분 설명 부

남은 자

로마서 9:24-29 남은 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남은 자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남은 자’에 해당되지 아니하면 ‘살아 있는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원래 인간 세계에서는 ‘남은 자’ 개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라면 다 살아있는 중이다 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남게 하셨다’는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남게 하셨다는 의식은 그 전에 자신들이 어디엔

예수님의 자리

◆ 설교 요약 ◆ 2010년 12월 26일〈 지난 주 설교 요약 〉당연히 예수님이 자기 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만 따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격리되어 홀로 예루살렘의 최종 지점으로 나아가십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나 악마가 보기에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새들처럼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은 자의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다 결정되어버렸습니다. 그 능력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이번 주 설교 요약 〉본문 : 누가복음 9: 57-62 제목 : 예수님의 자리 인간에게 붙잡을 것이 있다는

육신과 죄

로마서 7:12-17 육신과 죄 흔히 ‘매너가 나쁘다’고 지적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사회성이 나쁘다고도 할 수 있고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말해서는 ‘육신에 속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란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 신체를 두고 말합니다. 육신은 선과 악에 민감함을 보이면서 발악하는 중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자로 자처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선함을 위해 남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선한 자’라는 기준을 지니고 사는데 이 기준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육신은

이방인 구원

본문 : 누가복음 17: 11-19 제목 : 이방인 구원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연결시키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에게 보이라면 어떻게 성사시키려고 할까요? 천지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 몸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네 상식에 의하면 그냥 집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 하나님 눈에 제 모습이 보이지요? 그러면 그것으로 제 몸을 하나님에게 보인 셈이 되는 것으로 칩시다"고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거부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어이 자신을 구원시켜보려고 애를 쓰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기를 쓰고 사람들을 구원시키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의 방침이

이웃과 원수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목사님의 성경신학의 ‘선택과 이웃’이라는 주제를 읽다가 한 가지 이해가 필요한 점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선택과 이웃’에 목사님께서 네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들어 ‘내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내 이웃으로 이웃의 범위가 제한적인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원수는 내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로 이런 자까지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내게 자비를 베푼 자)을 사랑하라 는 정의가 서로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불일치 되는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목사님의 답을 기다립니다.

세상 일

고린도전서 7:32-35 세상 일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나서기 전에 광야에서 먼저 마귀와 만나도록 성령님께서 주선하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 일’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분명히 해두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자라나면서 현실의 범위도 같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몸집과 자신의 정신세계가 확대되면서 ‘세상 일’에 대한 집착과 같이 팽창합니다. 이는 ‘세상 일’ 밖으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일이 자신의 운명이요 전부요 생명이요 유일한 현실이 됩니다. 세상없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고히 박히게 됩니다. 이런 데

'피'를 읽다 질문 드립니다

271페이지 중간쯤 보면, 법이란 연결고리가 없고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법의 어떤 속성을 설명하시려고 이런 법의 단절된 속성을 말씀하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망과 영생

로마서 6:19-23 사망과 영생 인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사망과 영생입니다. 사망과 영생에 대해서 인간의 관여를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사람들이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죽음과 영생이 평소의 인간들의 애씀과 무관하다면, 그렇다면 인간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 백성들은 나름대로 자기 일생을 애씀으로 꾸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90:9-10의 말씀으로 모든 게 결론 나버립니다. “우리의 모든 날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분의 질문

(어떤 분의 질문) 안녕하세요. 십자가마을 읽고 있는 독자 입니다.현재 어떤 교회도 다니지 않아, 마땅히 물어 볼 목사님이 없습니다.바쁘신 줄 알면서도 질문하게 되었습니다.해외랑 연결될 수 있는 sns 매체를 통해 현재 중동(바란 Paran)에 살고 있는한 무슬림으로 부터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바란이 어딘지 현재의 지정학적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면서 영어 원문(질문에 해당하는 근거 자료 5장)을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평신도 같아 보이는데 무슬림,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 보였고, 그것에 대한 학구적인 뭔가가 느껴졌습니다.자신의 신앙(신념)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도 많은 듯 느껴졌습니다.기독교 거짓

탈출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사람에게도 이 세상은 그 사람을 가만히 두질 않네요. '노력하면된다.' 사람들이 보기엔 제가 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고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력이란것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있는것을 더욱더 불려나가는 것을 노력하는것이라 생각하는듯 합니다. 애초에 소경이 눈을 뜰 순 없듯,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력이 뭔지 상상도 못한채 '노력 안 하는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욕만 먹게되겠죠.이제는 욕먹어도 별 감흥을 못느끼는 지경이 된것같은데 왜 세상에 끼어서 어찌할줄 모르고 바라는것은 탈출하고 싶은 마음만 드는 상황을 주님께서 만드시는걸까요?

어린 아이 신앙

고린도전서 3:1-5 어린 아이 신앙은혜가 등장하므로 서 어떤 자가 육신적인 사람인가도 함께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믿는 바가 과연 제대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옳게 믿는 것이 아닌지를 큰 무리 속에 가담해서 확인해야 비로소 안심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관심을 떠난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떼를 지은 무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일하심의 현장에서 나오는 겁니다. 언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편 가름

본문 : 누가복음 23 : 32- 35 제목: 편 가름 우리 인간들은 세월 지나면 모두 잊혀 질 자들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내뱉는 모든 말들을 발설하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질 것들입니다. 부질없는 외침과 몸짓들, 웅성거림과 동요,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패 가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큰 소리 친다고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주목받는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하튼 예수님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그로 인해 자신을 결과적으로 의식하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져가는 자들입니다. 차라리 ‘사라져간다’는 말이 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와중에서도 은근히 사람을 두 영역으로 구분 짓고 계십니다. 39절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항상 거짓말쟁이 그레데 사람 1(딛 1:12, 개역)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같은 의미의 글이라서 먼저 올려 봅니다.마가복음 27 :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011/07/01 14:33 in 마가복음 마가복음 27 : 기도(빈터, 십자가=처음자리, 뒤로빼돌리기) 외에는 귀신의 정체 조차도 밝혀내지 못함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오후 11:16:48 김대식(막 9:14, 개역)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막 9:15, 개역)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

삼상초반부부터 통독중인데요 초반부에 보면은

안녕하세요우리 목사님 오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입니다.오늘은 신정6동 지구촌교회 에 김세환 집사님의 찬양과 간증으로 은혜로운 크리스마스가 되었네요.그런데요 오늘부터 삼상부터 다시 통독중인데요 삼상에서 보면 엘가나의 자녀들때문에 블레셋궤를 빼앗기지만 사무엘의 왕권으로 인해 궤는 다시 찾게 되는데요 그런데 궤를 찾게 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요구하는데 특별히 왕을 새로 요구하는이유는 자세히 없더라고요 왜 백성들은 다른 왕을 요구한 것인지요알려주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광야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0:1-4 광야의 그리스도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서기 전에 그들은 홍해를 건너지 않는 지역인 애굽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살던 지역을 떠나 홍해를 건너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홍해를 경계로 해서 도저히 산 사람은 딛을 수 없는 새로운 공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에다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민족인 이스라엘을 그곳을 통과케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이라는 광야 후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 속’에 마련되어져 있다는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냥 통과한 자에게 약속의 땅이란 전혀 무의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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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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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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