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는 이렇게 (제 2탄)

제 2 탄 공격 21: 내가 구원받았는지 아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답변 21: 본인이 구원받아 챙겼다는 즐거움 보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을 증거하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은 구원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공격 22: 남이 구원받았는지 아니 받았는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무슨 자격으로, 무슨 권리로? 답변 22: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어떤 행함도 그리스도 의 앞에서 ‘의(義)’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단들은 누가 이단이라고 지적해서 이단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스스로 “나는 십자

제발 죽지 않게 해줘!

“제발 죽지 않게 해줘” 베네수엘라를 14년 동안 독재한 차베스 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이다. 이 말을 사람에게 한 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냥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그는 ‘자기 죽음’을 비-현실인양 여겼다. 죽음을 전제로 하면서 인생을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길에는 보드 스케이팅을 타는 자들은 달리는 보드를 딛고 이동한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명의 힘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힘으로 산다. 죽음이 죽음으로 이끄는 힘에 의해서 인간이 살다가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최종기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밑에서 바치고 이끄는 것은 ‘죄’라는 보드이다. 이 죄를 통해 모든 인

Gospel Embedded in Social Relationships : Slaves &…

title : Gospel Embedded in Social Relationships : Slaves & Masterpreacher : pastor Lee Geunhotext : Ephesians 6:5~9date : 2020/01/12 5.Slaves, obey your earthly masters with respect and fear, and with sincerity of heart, just as you would obey Christ. 6.Obey them not only to win their favor when their eye is on you, but like slaves of Christ, doin

결혼의 의미와 교회

결혼의 의미와 교회 결혼이란 존재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그 자체의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 결혼이다. 어느 한 시점, 어느 한 순간의 눈부신 불꽃을 보기 위한 달려가서는 아니 된다. 아예 목표와 목적이 없어야 한다. 결혼생활에 목표와 목적이 생기면 그것은 피곤함을 유발하게 되고 긴장도를 높이게 되고 힘든 생활이 되고 비극으로 끝난다. 함께 살면 살수록 괴롭다. 마치 종이배를 만들었으면 흐르는 물 위에 띄우고서는 물 흐름에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종이배에 물만 적시고 도로 땅바닥으로 끄집어내어놓으면 ‘존재’로 변한다. 존재는 버텨야 모양새가 유지되기에 그 자체가 힘들다. 하지만

영화 [버닝] 평

영화 [버닝] 평- 세상 사람의 세상 읽기- 이창동 감독은 11년 전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젊은 나이에 파괴된 가정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가상 진실로 옮겨 타려는 시도가, ‘신의 용서’ 앞에서 좌절되는 내용을 그린 영화였다. 즉 피해자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다고 알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자식을 죽인 범인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신의 용서’를 받아야지만 구원이 된다는 장벽 앞에서 그녀는 절규하면서 신을 뒤로 하고 다시 허무한 세상을 돌아온다. 구원이란, 내가 만든 세상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는 영화 [버닝]을 가지고 삶의 의

행패 부리는 인생

행패 부리는 인생시중에 TV드라마의 내용은 어떻게든 인간들을 살리려 하는 식으로 극이 전개된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간증집회는 결국 TV드라마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실제 세상에서의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을 더 확실하게 밟아 죽여주신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계속 유세를 떨고 행패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살 자격이 자기에게 마땅히 있는 것처럼 행패 부린다. 신을 향하여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살게해 달라고 행패 부린다. 기도 형식으로 행패부리고, 예배와 찬양 형식으로 행패부리고, 봉사활동과 헌금과 성경공부에 참여해주는 것으로 행패 부린다. “이래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를 바꿔주지

죄보다 용서가 먼저다

죄보다 용서가 먼저다 창세전에 십자가 질 것을 목적지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를 깔아두셨다. 인간은 죄를 지어야했고 그 죄 줄기와 파도를 타고 와서 용서의 세상의 해변에 도달되도록 하셨다.이런 일방적인 용서의 출처는 오직 십자가 사건이다. 거기서 쏟아내신 ‘언약의 피’가 시간을 역류시켜 세상을 덮친다. 하나님께서 ‘피 없이’는 일하지 아니하신다. (히 9:7) 이로서 세상은 ‘언약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 시간으로 짜놓으신 카펫이다.그런데 인간들은 선악 지식으로 무장된 채 그 카펫을 더럽히고 훼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시킨다. 시간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자신이 구원되리라 믿는 희망으로 죄 위에 깔아둔다.

새사람을 입으라!

주 안에서 갇힌 자가 명령한다. 갇혀 있으므로 그가 한 명령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지 않을까. 명령은 그저 말일 뿐, 나를 어쩌겠는가. 그러나 사도바울의 아래 명령은 참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왔다.새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을 입으려고 하면, 우선 내가 새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수긍되어야 한다. 이미 새사람인데 또 새사람을 구할 필요가 없지 않나. 자신을 헌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하더라도 이 명령을 지키기가 만만치 않다. 새사람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그 사람을 구한 후엔 어떻게 입을 것인가? 그 사람을 입고 나면 내가 새사람을 입고 사는 것인지, 새사람이 나를 품고 사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

[텅빈 형식]-송민선 성도님의 글

조선 시대에 양반 가문에서 대를 잇기 위해 대리모의 몸을 빌려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었다. 영화에서 한 감독이 이런 풍습을 남아선호사상을 넘어서서 태가 죽은 이를 위해 산 자가 희생되는 악습으로 규정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극 중에서 어미가 자신처럼 대리모가 된 딸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그 집에 가면 마당에 돌멩이 하나에도 정 주지 말어’ 아기를 낳는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딸이 받을 고통을 예감하며 물체 하나에도 마음을 주지 말라는 어미의 말이 차라리 ‘그냥 숨을 쉬지 말어’라는 말보다 혹독하게 들린다. 뭣도 모르고 대리모로 떠난 딸은 남자의 씨만 받아서 잉태된 아이를 잘 낳

현대신화론..

1ㅡ롤랑바르트가 말하는 현대의 신화론이 궁금한데..핵심이 몬지 집어 주십쇼현대의 무엇을 신화로 보고 있나요? 2ㅡ 바르트의 신화론을 유비시켜서그럼 개혁주의와개혁주의 신앙,,복음주의와복음주의 신앙 이라고 명명된 것들을현대신학신앙들의 신화 ㅡ로 본다면맞을가요?,,,2가지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집요한 오락

집요한 오락 오락이란 “내가 누구지?”를 겨냥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관심은 오직 ‘나’에게 쏠려 있다. 도박이 그 예다. 끊임없이 게임하고 승부를 걸면서 늘 내면에 피어나는 것은 “과연 나는 누구지? 나는 어느 정도지? 나의 존재함에서 나오는 위력이 남들에게 어느 정도로 대단하게 보일까?”를 자꾸만 묻게 된다. “나의 주특기는 무엇이며 나에게는 무슨 재주가 걸출하며, 나는 무엇에 소질이 있으며 나는 어떤 식으로 해야 스스로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몰입하므로 서 자아내는 환경이 바로 오락 환경이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모든 게 오락이요 장난질이요 농담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2016.7.17. 성경모임-히브리서 7장] 멜기세덱이 뭐꼬…

히브리서 7장은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멜기세덱이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냐고?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다.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다. 아,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구나.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자의 이름이 정의와 평화의 왕이라니. 의와 평강의 왕이라는 그 이름이 현재 나에게 정의롭지도, 평화스럽지도 않은 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부모, 아내, 자식이 아프고 사업이 망하는 등 그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의는 무엇이고, 평강은

어떤 선을 넘어서

어떤 선을 넘어서 생명길로 들어선 자들이 어떤 선을 넘어 드문드문 알 수 없는 길로 걸어가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허가받은 자들이다. 그 길은 좁은 길더 이상 세상에 미련 둘 필요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는 길이들 눈에는 복음의 광채만 보인다. 가끔은 뒤돌아서서 떠나온 자리를 본다. 아직도 하나님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서 웅성거리는 집결된 많은 무리들이 멀리서도 보인다.뭔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들은 하지만 천사들이 헌병이 되어 선을 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전에 자신이 살던 그 곳이다. 불안과 염려로 끊임없이 시달려야 할 자리. 저렇게 남겨진 자들이 불쌍하고 애처롭다.

그저 단순한 과장법이라고 하기에는..해석부탁드립니…

신천지, 이만희 목사의 저서를 읽고

신천지, 이만희 목사의 저서를 읽고(『천지창조(天地創造)』『성경에 대한 계시와 주석』) Ⅰ. 이만희 목사의 주장 이만희 목사가 내세우는 기존 교회와의 차별화는 ‘약속한 목자’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오직 예수님 한 사람만이 아는 것 같디, 신약의 성취도 오직 한 사람이 보고 듣고 예언과 실상을 증거하므로, 이 한 사람을 찾아서 만나 증거를 받아야만 계시록을 알 수 있다. 말세의 성도는 계시록 사건을 알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 본문을 해설하는 자는 계시록 전장 사건을 현장에서 보고 듣고 증거하는 것이므로 이 증거가 참이다.”(『계시와 주

주님의 은혜 -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 글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사랑으로 다가 옵니다.그 사랑은 섬김과 희생으로 다가 오니 말입니다.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죄인을 위해 대신 희생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는 것을 사랑이라 합니다.그러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요일4:18).두려움이란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고 처리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부담감을 안고 어떤 공포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그 공포의 끝자락에는 보이지 않은 주님의 심판이 능력으로 늘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나라는 주

도가니

도가니 금속마저 녹이는 무서운 불을 담는 ‘도가니’ 이야기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이루어진다. (무진시霧津市-실제로는 광주시) 귀머거리나 정신 박야한 아이들을 자애학원(실제로는 인화학원) 교육 책임자들이 정기적으로 강간해 온 실화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왜 공지영 작가는 제목을 ‘도가니’라고 했을까? 그곳은 외부의 그 어떤 구조의 손길과 관심도 닿지 않은 블랙홀과 같은 폐쇄된 환경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옥의 불길처럼 악이 마음껏 분출되었고 피해 아동들은 그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이 가두어진 처지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악을 불꽃으로 표현하자면 그곳은 분명 ‘벌건 도가니’다. 소설의 내용은 여기에

[십자가 잉태] -송민선 성도님의 글

오직 하나님께만 죄를 발산할 죄인이 어미 자궁 안에서 자라고 때가 되면 커다란 세상 자궁 안으로 배출되면서 죄 안에서 태어나고 죄 안에서 양육되는 죽음 안에 감금되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기에 내부에서 같은 류끼리 진정한 소통을 하며 가치와 보람을 누리고 선을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며 아무 문제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이 세상다웠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불법의 세계에 죄인과 동등된 출산의 형태로 세상에 내어주셨을 때, 갇힌 자의 육안으로는 예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으며, 예수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 된다. 그러나 기존의 구조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 안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동질이 아니고 이질적이었고 우리는 의롭다는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멀리 사시는 어떤 목사님 내외분이 성경 공부에 참석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10여 년간 목회하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인들도 많이 모았다. 독자적인 예배당도 건립했고 그곳에 교인들로 가득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다가온 것은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깊은 허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였다. 일반 교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목사님의 심정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자신들도 자기들만의 생계 수단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안정적일 때,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도 정신적으로 비로소 안도감을 찾듯이, 목사 가정에서의 생계수단은 안정적인 교회

감당 못할 비밀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고 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사랑의 영’을 좋게 여기면 안 됩니다. 사랑의 영이란 것은 내가 네가 할 일을 다 빼앗아서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관심사를 빼앗아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의 사랑을 증거케 하겠다는 것입니다. 찾아드는 주님의 사랑이란 ‘내가 주님을 보는 그 시선에 대해 밉게 보는 감정’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미워하므로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칼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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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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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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