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3]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4 장: 교회사를 통해서 본 예배

1. 속사도 시대의 예배: 이 시대에 중요한 근거는 주후 140년까지는 고린도에 보내는 그레멘트의 로마에서의 편지였습니다(A.D 96). 또한 핀스(Pning's)의 편지로서(A.D. 112) 통치자 트라얀(Trajan)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ㅣ그리고 디다케(Didache. A.D. 130-140)로서 희랍어로 기록된 교제 3장 231페이지에 있습니다. 일자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속사도시대 예배에 대하여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키뒷쉬(Kiddush)는 원칙적으로 성만찬(Eucharist)다음에 행해지는 애찬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간단하게 합니다. 수요일과 금요일로 지키는 것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때마다 죄를 고백하게 하여 청결케 하고 감사를 드리게 하면서 떡을 떼게 하였습니다. 단 주일 예배시에는 성찬 예식을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성찬은 주일마다 시행하여기념하였습니다. 유월절에는 연중행사이지만 주간에는 아니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키뒷쉬(Kiddush)는 주간행사가 아니였습니다. 초대교회는 키뒷쉬(Kiddush)와 최후만찬이 있었습니다. 최후 성만찬의 시작을 존증하여 본다면 과거 유대민족이 잊을 수 없는 유월절의 기념을 하기 위하여 모여, 밤에 행하는 예식입니다. 성찬의 의미는 유월절의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애찬은 전에 있었던 일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일을 다시 관찰하는 뜻이 있습니다(Ibid,. pp. 6-7). 특히 메시야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 만찬의 기원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엄밀하게 말하면 가정적 의의가 있습니다. 애찬은 항상 남자들이 관찬하는 것이였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습니다. 떡(하르토스 )은 항상 키뒷쉬 흐름에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즉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광범위한 개요를 주었습니다(Jones, G. Wainwright, E; Yarnold.(ed) "The Study of Liturgy, p. 4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예배가 분명한 이념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카톨릭은 바울이 죽은지 70년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기록에서 보면 사도들이 실시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세례 예식후 성찬예식이 있었던 기술입니다. 그는 더욱이 떡과 잔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받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 중심 의의를 떠나서 시행하는 것이 아닙을 덧붙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일 예배시 거행하는 예식임을 서술하였습니다(Ibid., p.37.). 헌금은 주로 다른 이들을 도와 주기 위해서 해야 할 그 예식의 순서의 하나임을 알게 됨으로 2 세기에서부터 시행된 것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2 세기 초엽의 예배는 성찬예식과 성경적 요소를 그대로 견지해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시와 찬미를 제처놓고 기도로만 두 가지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 시(Celebrant) 각각 역량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였습니다. 모든 성도가 "아--멘"이라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 의식은 성전 단상에 서서 백성들에게 보이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때 헌신의 표시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실은 2 세기가 아니고 터툴리안(Tertullian) 때부터 준비한 것으로 그것은 부활절 저녁에 뜻있게 시행된 것이였습니다.

2. 교부시대의 예배: 로마에 있어서의 제 2 세기 예배를 묘사한 한 서사문은 이 두 요소가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이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약 140년경) 황제에게 보낸 첫 번째 변증서에서 나왔습니다(Justin Martyr, "First Apology", XV-LXVII) 즉 태양의 축일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도시와 촌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한 장소에 모여 사도들의 언행록이나 예언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사회자가 낭독한 성경귀절 중에서 내포된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교훈하며 권면합니다. 그 후에 모두 기립하여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로 기도가 끝나는 다음에 떡과 포도주와 물이 운반되었고, 사회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기도와 감사를 드리면 회중들은 모두 "아-멘"으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축복기도한 물질의 한 몫을 받아 나누며, 그것은 또한 집사들에 의하여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분급되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기도와 성경 낭독과 교훈이 연합된 성찬식적인 예배(Eucharistic service)를 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포도주의 의식에 있습니다. 멕스웰(Maxwell)이 지적했듯이 이 초기 예배에서 우리는 성례전적 요소와 성경적(scriptural) 요소 사이에는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읽고 교훈하는 것과 떡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수령하는 일은, 이 예배 의식의 불가불한 요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한가지도 없어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전 초대교회의 유동성 있는 예배로부터 동방과 서방교회의 특징 있는 예배 의식들이 발전되었습니다. 양 교회의 예배 의식의 기본적 구조는 동일 하였습니다. 즉 말씀과 성례전(word and sacrament)의 두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동방교회는 풍부한 상징적 요소를 가진 매우 정교한 의식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보다간략하고 보다 직접적인 서방교회 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방교회는 떡과 포도주의 준비를 그리스도의 수난의 내용을 면밀히 상징하는 성찬상의 의식으로 바꾸어 그것으로부터 예배를 시작함에 반하여, 서방 교회는 말씀의 예전으로부터 시작하는 본래의 순서를 그대로 지겼습니다(R.S. Franks, "Christian Worship in the Middle Ages", N. Michklom(ed), "Christian Worship. p.12). 성례식의 행위는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라고 불리우는 휘장에 의하여 예배자들로부터 숨기어지고 그 문들은 다락방의 의식(성찬식)이 진행되는 동안 닫혀집니다. 여기에 휘장 중앙의 큰 문을 통하여 성소로 진행되는 동안 닫혀집니다. 여기에 휘장의 중앙의 큰 문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가는 두 종류의 입당예식(ceremonial entrances)이 행하여지는데, 곧 말씀의 예식이 행하여질 때 성직자와 보조자가 복음서를 들고 들어가는 소성입(小聖入, little entrance)과 다락방의 예식(성찬식)때 성도들의 기도가 끝난 후 성찬상에 준비된 떡과 포도주가 주의 식탁으로 운반되는 대성입(大聖入, great entrance)입니다. 구원에 관해서는 양 교회간에 상반된 신학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동방교회의 입장에서는,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인간의 신격화이며 서방교회의 입장에서는, 그 구원이 십자가의 화목제사의 결과라고 봅니다. 따라서 동방교회의 성찬 예식은 교제와 행위인데 반하여 서방교회에서는 화목제사의 관념인 것이 지배적입니다. 동방교회에서의 예배에서는 헌물은 성례전에 사용되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별된 예배자들의 예문임에 반하여, 미사에서는 그것을 축성된 후부터는 희생의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피인 것입니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의식의 정교와 서방교회의 원시적 예배(primitive rite)에 대한 곡해와 함께 우리는 중세기에 있었던 동서 양 교회에 있어서의 설교의 쇠퇴를 보게 되는데, 즉 성찬예배는 종종 전연 설교 없이 행하여 졌습니다. 그 결과로 본래 있었던 말씀과 성례전과의 균형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동방교회에 있어서의 예배는 사실상 신비의식화 되었고, 서방교회에 있어서는 화체(transubstantiation)의 비적이 결정을 이루는 구경거리 연극으로 화해 버렸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프랭크스(Franks)가 상기시키듯이 "동방과 서방에 있어서의 중세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고찰되어야 할 점은 성찬식(Eucharist)이 고대교회에 있어서의 마찬가지로 시종 기독교교회 예배의 기초이며 중심이 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성찬식)으로 돌아가고 또한 모든 것은 그것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Ibid.m p. 1109).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크레멘트(Clement, 220), 터툴리안(Tertullian, 240), 오리겐(Origen, 251)의 기록과 애굽의 감독인 트미우스(Thmius)의 사라피온(Srapion, 340)에 예속된 기도서와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의 요리문답 강해서입니다.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교회 법전은 역시 흥미거리가 되는 증거들이 마련되어 있고 분리하여 토론된 것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라피온과 히포리투스(Sarapion and Hipploytus)가 제외한 모든 기록들과 헌신기도(신앙 간증기도)와 다락방의 의식이 취급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의성(秘義性. the secrecy)이 단기간이지만 저스틴(Justin)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틴(Constantine)까지 관찰하여 보면 그것은 훈련적 비의(disciplina arcani)로서 알려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프리아냐(Cyprian)은 잘 알려진 분으로서 신앙고백의 기도를 소개하는 예식서(Supsum corda)를 처음으로 저술하였다. 역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예배를 시작할 때 성경을 읽어주는 인사의 취지의 내용으로 된 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만날 때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첫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에 이어 개회기도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기념의식은 단순하면서도 질서정연하였습니다. 기도는 일어서서 하거나 무릎을 꿇고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주의 말을 들을 때 일어서는 것처럼 일어서는 것이 풍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씀의 강해나 말씀 전달(講論)은 강대에서 행해졌습니다. 예물과 헌금은 헌금시간에 드리었습니다. 성찬예식에 있어서는 성찬의 떡을 떼고 잔을 들 때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성직자가 들었고, 다음에 지도자들과 남자, 여자 등의 순으로 들게 했습니다. 성단 앞에 있는 성찬상에서 예식을 시행하였습니다.

3. 중세시대의 예배: 초기 기독교 안에서 시작된 예배 의식과 신도들의 생활 양식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충분히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외적인 형식과 예식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세시대는 미사(Mass)라는 예배 행위를 통하여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가 성행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외적인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가 성행하게 된 것은 성례의식주의(Sacramentalism)와 성직주의(Sacerdotalism)의 신학적인 제도에 기인한 것이였습니다(W.P. Macwell, op. cit., p. 144.). 중세 시대의 예배는 신비 종교와 이방 종교의 어떤 관습과 의식을 첨가하여, 구약의 이전 제사 제도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적인 면을 보고 만지는 성찬의 예식에서ㅏ 찾고 음미하려는 일종의 감각적 호소 방식을 택함으로써 많은 미신이 생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5세기 경부터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까지는 일정한 시간에, 고정된 예배 의식에 맞추어서 일정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강조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미사(Mass)의 발전이 있게 되었습니다. (1). 미사(MASS): 미사는 로마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 형태로서 신부가 집례하였으며, 구약의 성전 예배 형태를 변형시켜 행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미사는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으로써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식에는 수많은 성경읽기, 교독과 교창, 끝없는 기도문, 찬송 및 성자들의 기념 축자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거행하는 데는 수많은 책이 필요했습니다. 즉 시편, 교송성가(交誦聖歌), 찬송가, 성경, 특별 기조문의 책, 행렬성가 그리고 사회에 필요한 식례집(式例集), 서품 정식서(敍品 定式書), 성무 안내서(聖務 案內書)들이었습니다. 미사에 이와같은 거창하고 복잡한 의식이 포함된 것은 성례전을 통하여 은혜가 내린다는 일종의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인 교회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6세기 경에 동,서 기독교회는 각기 자기네의 고유한 예배의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동방에서는 알렉산드리아식, 수리아식, 비쟌틴식으로 알려진 삼대 의식 유형이 있었고, 서방에서는 주로 갈리아와 로마의 예배식이 있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풍부한 의식을 사용한 정교한 예배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서방 교회에서는 약간 간접적이고 간략한 예배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찬 예식도 강조점이 달라 동방 교회는 교제의 행위로 서방 교회에서는 화목제물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동. 서방 교회에서는 한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강론 쇠퇴 내지는 강론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예배 의식이 이처럼 동. 서방으로 갈라져 있었다고는 하나,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로마 카톨릭식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식의 예배 의식은 서방 전역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중세 시대의 고정된 예배 순서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의 종류, 특징 및 폐단 등을 잠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는 정식 미사(Pontifical High Mass), 독창(讀唱) 미사(Low Mass), 미사 시카(Missa Sivva)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식미사(Pontifical Mass)는 사교(司敎)가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신부(司祭)의 협조를 받아 사회를 보고 찬송을 드리는 미사였습니다. 이 정식 미사에는 사제가 드리는 미사말고 한 사제가 집사들의 협조를 받아 드리는 노래 부르는 미사(High Mass)가 있었는데, 이 미사는 성가 부분을 노래하는 잘 수련받은 찬양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독창미사(Low Mass)는 협조가나 성가대가 없이 한 사제가 거행하는 일반 미사였습니다. 제 6 세기 경에는 독창 미사가 일반 예배의식이 되었습니다. 또 미사 시카(Missa Sicca)가 있는데 이것은 마른 미사(Dry Mass)라고도 부르고, 이것은 떡과 포도주의 헌납이 없고 성찬이 없는 독창 미사였습니다. 위의 대표적인 3가지 미사 외에도 많은 사적(私的)인 미사가 있었습니다. -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비(雨)를 위한, 또는 좋은 날씨를 위한 미사 등 -- 수많은 미사가 있었습니다. 맥스웰(Maxwell)은 이것을 지적하여, "이러한 사적(私的)인 미사들이 교회의 영혼을 좀먹는 암이 되었다"과 하였습니다. 중세 시대의 미사는 라틴어로 거행되어 회중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회중은 자연 예배의 참여자라기 보다는 관람자격이 되었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개방되지 아니하고 사제들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일반 회중은 사제의 강론에만 의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자국어(自國語)로 되어 있지 않았고, 성도들의 생애와 전설의 일단(一端)이 성경의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 예배는 신부와 소수의 성가대에 으히ㅏ여 라틴어로 진행되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예배의 존엄성을 고창하게 하는 일변은 있었으나, 신자들의 일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였습니다. 더구나 16세기 경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設)이 완성되고, 교회의 미사가 일정 불변하게 되자, 주의 만찬식은 미신과 뒤섞였고 회중은 일년에 한번 부활제 때만 참석하게 되어 교회의 미사는 신자들과 더욱 동떨어진 거리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는 분명히 몇가지 폐단이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유료(有料) 미사와 유료 면죄부(免罪符) 발행은 착취의 근원이 되었으며, 교회 내부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의 미사는 화해적 성격을 강조하여 모든 종류의 악폐를 유발시켰습니다. 회중은 의식의 참여자이기 보다는 단순한 방관자가 되었고, 미사는 서로 맞지 않고 알기 어려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취한 기도들을 주워 모은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는 성찬의 음식과 예배자들을 봉헌하시는 성령을 위한 기도가 없었습니다. 미사는 죽은 말(死語)로 드려졌기 때문에 정적(靜的)이었으며, 이것은 무식한 회중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도마의 예배는 이상한 말로 드리기 때문에 참 예배의 필수적인 표적 가운데 하나인 덕성의 함양 -- 예배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것 -- 이 부적하다)라고 지적한 데이비스(Davies)의 말은 앞의 폐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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