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한국 교회사 정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8. 아빙돈 단권 주석 논쟁 : 아빙돈 단권주석의 출판은 한국교회에 적지않는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감리교에서는 대단한 환영이었지만 장로교에서는 교단적인 차원에서 그 주석을 장로교 내의 목회자들은 절대 구매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고, 그 주석의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문제시되어 아빙돈 단권주석의 파장은 한국교회 전체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주석이 논쟁거리가 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먼저 그 이유를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 50주년이 되도록 사실, 한국인들에 의해 기술된 주석은 고사하고 번역주석하나 없었다. 이런 국내의 현실을 잘 알고 감리교에서 선교 50주년을 맞아 감리교 유형기 목사가 책임하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아빙돈 출판사에서 출판한 단권주석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던 것이다. 막상 출판하고 보니 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지금까지 한국장로교회가 지켜오던 신학적인 방향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거기에는 이미 벨하우젠의 문서비평, 궁겔의 구전, 알브라이트의 성서 고고학, 역사, 신학, 그리고 전승사 등이 채용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아빙돈 성경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해 졌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톤의 입장을 떠나 성경이 오류가 있지만 권위가 있다는 새로운 신학조류에 맞추어 기술된 주석인 것이다.

 

이문제가 1935년 제24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채필근은 주석에 참여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과 재판시 자신의 글을 빼겠다는 약속을 한 반면, 김재준, 송창근,한경직 세사람은 신학지남에 성명서를 내었다. 이 사과문은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며, 이문제로 교계에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는 것이다.

 

아빙돈 주석문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신학적인 면에서 동질감을 형성했던 장로교도 이제 서구의 신학적 조류의 변천에 따라 변천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선교 희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신학이 선교사 중심에서 한국인에게로 전이되어 오면서 한국교회는 성숙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답습하는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찾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로교 총회가 표준 성경주석을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런 시대적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총회차원에서 이것을 결의하고 박형룡 박사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19. 창세기 저작 문제와 여권논쟁 : 전통적으로 모세 저작권을 인정해 오던 미국기독교가 19세기 말엽부터 독일로부터 일어난 성경고등비평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보수적 입장에서 후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선교 50주년을 맞는 1930년대 초에 한국 장로교에서도 창세기 저작권 부인 문제와 여권문제가 제기되어 총회적인 차원에서 두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은 기독교 이 천년의 고백이었다.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 저작에 관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교 관서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년동안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김영주 목사보다 모세 저작권 부인문제보도 더 노골적으로 총회의 보수적인 입장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김춘배 목사였다. 그는 급변하는 현시대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있는 이 현시대에 교회도 여성들의 지위를 현실화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두 문제는 총회적인 차원에서 다룰 정도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 두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1934년 제 23차 총회 때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위원회는 모세 저작에 관해서 오경의 모세 저작권 부인은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것이며 오경의 모세 저작을 인정한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일대도전이며,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진리라는 것이다. 여성안수의 문제도 바울의 말은 당대에만 진리가 아니라 시간을 넘어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만약 성경의 진리가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국한된 현상이라면 성경의 모든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며 그런 변할 수 있는 진리는 성경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입장을 단호히 하였다.

 

이 사건은 현대 우리에게 적지 않는 교훈을 안겨다 주었다. 먼저 감리교와 장로교의 입장차이다. 또 하나는 총회가 두문제를 단호하게 결정함으로써 신학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내렸지만 그것이 곧 이 두 문제에 있어서 장로교회 내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김영주 목사와 김춘배 목사가 자신의 주장을 번복한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잘못을 깨닫고 방향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총회의 압력으로 목사직이 면직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여권문제가 단순한 해석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관과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함고 , 총회적인 차원에서 그 문제를 진정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 그렇다면 여성이 교회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고,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방향에서 지도해야 할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교파나 교단이 해야 할 몫이다.

 

20. 적극신앙단 논쟁 : 적극 신앙단 논쟁은 1930년대초 당시 Y.M.C.A 총무로 있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적극 신앙단이라는 단체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1883년 3월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한 신흥우는 일찍이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1927년 신흥우가 Y.M.C.A 총무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연구회라는 반선교사, 반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연구회는 선교사가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순수하게 조선 사람들이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 설립을 추구하였다.

 

조선적 기독교를 표방하는 신흥우가 자신의 이상을 좀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1928년 예루살렘 선교대회였다. 이 대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토착화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가 외친 토착화란 탈선교사, 탈보수주의, 탈서구화, 탈전통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내건 토착화란 복음을 본질을 떠난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선교방법에 대한 토착화였다. 신흥우가 외친 토착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는 5개의 적극신앙단의 선언를 하였으나 삶의 부도덕(여자와 문제)과 독선으로 감리교부터 1934년 가입불가와 교직자 가입금의 방침이 내려졌고 장로교에서는 1935년 평신고 가입금지 권고와 위험한 단체로 규정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 당하였다. 또한 적극신앙단은 조선적 기독교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친일파화된 단체로 변질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내건 민족주의적 조선 기독교는 없어지고 신사참배의 강요에 동참하는 친일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로교 선교회의 지도자들이 미션스쿨을 폐교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단연히 맞섰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역사는 그래서 흥미있는 것이다.

 

21. 김재준의 신학사상 : 한인간의 사상을 평가하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향이 깊게 드러워진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단적으로 장로교 목사였던 김재준의 사상과 생애는 자연히 장로교사에서 박형룡 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재준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재준은 신학을 하면서 신학을 학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먼저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개방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개방적인 사고는 김재준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신학서적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신학서적들은 섭렵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김재준이 공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본과 그가 재학하고 있던 청산학원은 상당히 진보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학하는 동안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질수있게 되었다. 미국으로 다시 공부하며 미국4년간 그는 일본에서의 자유주의를 중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청산학원의 급진주의가 프린스턴과 웨스턴을 거치면서 진보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전향되었던 것이다. 

 

김재준의 사상의 원동력은 부분적으로 청산에서 받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생관과 귀국후 소선지서를 탐독하면서 체득한 예언자적 의식에서 발원하였다. 그의 사상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그를 반선교사상과 반정통주의 , 신학교의 설립과 교육, 그리고 세계조류의 합류라는 세가지 방향으로 이끌었다. 김재준의 예언자적 외침은 반선교사상으로 표출되었다. 김재준은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했다. 김재준은 프린스톤 출신들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장로교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로 만들어 벼렸다고 보았다.

 

신학지남 사건으로 김재준은 평양을 떠나 간도 용정 진흥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김재준이 평양을 떠날 쯔음 한국의 국내 교계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 문제로 해외 선교부는 한국의 선교지 철수를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의 보수주의 산실 평양 신학교는 폐교되었다. 신학지남도 폐간되었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한국을 떠남으로 한국은 신학교 부재와 보수주의 지도력의 부재상태가 되었다. 이런 보수주의 지도력의 공백상태에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은 김대현 장로의 거액의 희사금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교권적으로는 몰렸던 김재준이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고 자신이 개방과 진보주의 이상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재준과 이들 사상가들과의 연계성은 이들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형룡이 서투른 자신의 작업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된 서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았다면 , 김재준은 완성된 서구의 것보다는 서투르지만 자신의 신학세계를 만들러 가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김재준은 박형룡의 정통주의나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진보주의 사조를 한국교회레 뿌리내리는 역사의 주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2. 정경옥의 신학사상 : 송길섭 교수는 정경옥을 가르켜 한국교회의 신학초기 자유주의 신학을 확립한 신학자라고 예찬하였다. 정경옥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도덕적 인격성과 기독교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창했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감리교 신학자였다.

 

그는 게렛신학교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종교심리학과 종교신비주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정경옥은 경험론적 기독교를 추구하였고 체험의 신학자였다. 정경옥은 기독교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체험의 역사적 표현이며 기독교 신학은 이런 종교적 경험들을 편견없이 실제적 가치를 찾는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정경옥은 당대의 장로교 신학교 교수들과 비교할 때 기독교를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앞서 보았듯이 신비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가졌다. 이런 신비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그의 경험론적 종교관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 귀국후 형성된 감리교 신비주의 부흥운동은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신앙관의 토양을 제공하였다.

 

정경옥의 신비주의 사상을 정의하면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지, 감정, 직관, 의지 여하를 물론하고 사회전체로서나 혹은 개인의 자아의 인격적 총체로서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직접적 관계 즉 합일적 융합을 의식하며 이와 같은 합일의 경험에서는 인격이 근본가치와 우주의 절대목적을 이루고 지식의 객관적 확실성을 얻는다고 보는 종교사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정경옥의 신학은 일관성이 있다. 경험론적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신비주의적이 하나님과의 교통, 현대신학자 중에서는 바르트보다는 슐라이어마허나 리츌의 노선에 서 있었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전통에서는 라틴의 전통에서보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경옥의 신학은 적어도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또한 온건한 현대주의자였다. 현대주의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종교경험에 기초하여야 할 것 ”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하는 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명제를 정당시하고 있다. 그가 현대주의에 상당히 긍정하고 있지만 정경옥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분명하다. 그는 친히 잣니을 현대주의 맥락속에 분류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 즉 1)인간의 이성과 직관인 양심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점 2)경험일반을 종교화함으로써 종교행동을 혼동한점 3)역사적 기독교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한 것 4)기독교의 구속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다.

 

감리교 신학자들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을 택하였고 현대자유주의의 급진적인 특징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감리교 신학교는 서구와 같은 현대주의의 길을 그대로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평가절하시키는 종교다원주의와 민중신학이라는 급진적인 노선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택하고 말았다.

 

23. 이용도목사와 이단성문제 : 이용도목사가 말년 원산 예언자들과의 접속관계에서 악령에게 미혹을 당하였는가는 문제는 그의 이단성 시비와 관련하여 즐기차게 제기된 문제였다. 이문제의 규명은 이용도 목사의 신앙적 건전성 여부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이용도 목사가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사역말기였다. 그는 장로교로부터 특히 부흥회와 관련하여 많은 파란을 겪은 후 마침내 1933년 9월 평북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개최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 22회 총회로부터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와 함께 이단으로간주할수 있는 단체의 일원으로 지목을 받았다.

 

용도의 막역한 친구이자 용도를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미국인 선교사 피도수목사는 이 예언 운동의 기원이 용도의 사역과 무관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32년 2월 신학교 학생들이었던 젊은 여성들이 이른바 입신의 상태에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후 용도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으며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신탁을 하는 이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믿고 그들의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가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이 받은 감리교의 체험신학의 전통과 교리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예언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은 김인서였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이들이 예언이 악령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김인서에 의하면 영계 길선주 목사도 이 운동을 강신술의 일종이자 마귀의 역사로 보았다. 특별히 피도수 선교사의 논술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는 원산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을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용도의 이단성 문제는 현대교회사가들 사이에 엄청난 시각차를 가지고 있다. 이용도의 예언운동이 성령의 역사라기 보다는 신탁이나 접신과 같은 악령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도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이용도 목사는 지나친 교리적인 틀속에 기독교의 복음을 가두어두는 교리적인시각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속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햇고 이런 시각속에서 예언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용도를 비판하는 이들이 주장하듯이 이용도가 이단의 주창자는 아닌듯하며 예언자들에게 미혹되었다고 보인다.

 

24.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 193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흔들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합류하던 그 때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사람으로 남았던 민족주의자, 그러면서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 때문에 그는 마치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처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었다.

 

무교회주의는 1930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자유주의와 아빙돈 성경주석 여권문제 창세기 저작권 문제처럼 총회적인 차원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전국교회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던 문제였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1920년 6월 김교신은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담임목사가 교인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낀 그는 우찌무라 문하에 들어가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후 우찌무라 문하의 동료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만든다.

 

성서조선이란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기독교 정신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소탈한 민족애였으며, 또 민족해방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조선을 성서의 기초 위에 세우겠다는 희망은 곧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처음부터 일관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어느 어간에 상당한 변환을 맞았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였다. 무교회주의의 핵심은 그가 말하는데로 성서에 있던 교회의 본질적 부정에 있던, 일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무언의 항거에 있던 분명한 사실은 그의 글과 사상 속에는 한국의 기성교회에 대한 공격이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적 기독교를 외쳐야 했고 선교사들로부터 독립과 서구의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쳐야 했고 또 기성교회를 비판해야만 했다. 그는 이런 주장속에서 성경신학의 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거나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또한 한주 한믿음 한세례를 거부함으로 그는 스스로 비판을 자초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김교신은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조창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통해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하였고, 단순한 예배당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임자체를 교회의 신성한 본질로 고찰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