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신복음주의 개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김상복 목사의 신복음주의관(觀) 

기독교보 2002년 1월 19일자(11쪽)에 의하면,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의 월례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EFA 회장)는 "복음주의 운동의 활성화"라는 제목의 주제발표에서 "신정통주의가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최근의 표현이라면, 신복음주의는 정통주의에 대한 최신의 옷이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기피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겠다는 의도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다르다.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 사이에 이원론의 필요가 없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초자연적 개인의 구원 경험과 사회적 철학이다. 교리와 사회 윤리는 둘 다 기독교 학문이다. 근본주의가 리더십과 사회라는 영역에서의 책임을 포기하고 사회를 변혁하거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무능해졌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믿는 모든 전통적 교리를 신봉하거나[신봉하나?] 사회적 철학을 포함시켰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 신문에 보도된 것이 김 목사의 발표 내용이라면, 그는 신복음주의를 정통 기독교 교리의 신봉과 적극적 사회적 철학을 가진 최신의 정통주의로 정의한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그의 사상이라면, 그는 신복음주의나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또 사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책임과 교회의 단체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신복음주의는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될 그런 입장이 아니다. 신복음주의의 보다 본질적 내용은 자유주의를 포용하거나 자유주의화된 교단들로부터의 분리를 거절하고 그 안에 머물고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그들과 협력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성경에 교훈된 이단과의 분리의 명령을 어기는 타협적 죄악이다. 

또한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에 관하여, 전통적 개혁교회나 근본주의가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확신했던 바는 교회가 공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표준적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4에는 "[교회의]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 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되어 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지교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나 간에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교회가 직접 학교나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운영하지 않았다. 물론 교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따라 정치가나 교육가나 자선사업가 등이 있을 수 있고 또 교회가 정신적으로 그들을 측면에서 후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교회가 직접 그런 일을 경영하거나 관여하는 것은 교회의 본연의 임무와 사명을 저버린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막 1:38) 또 그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특별한 임무이었다(마 28:19; 막 16:15; 행 1:8). 

물론 교회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았고 그것은 사랑의 당연한 표현이었다(행 2:45; 갈 2:10). 또 교회 밖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교회의 제한된 시간과 힘과 물질을 가지고 교회는 힘써야 할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다. 주께서는 그의 전능을 가지시고도 병고치는 일을 주로 하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을 주로 하셨다(마 9:13). 

근본주의가 사회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근본주의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이단 신학을 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오히려 현재 세계적인 근본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북아일랜드의 이안 페이슬리는 목사로서 유럽 의회의 국회의원이며 북아일랜드 내에서 카톨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개신교 지도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전도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이다. 우리는 그의 활동을 북아일랜드의 특수 상황이라고 이해하려 하지만, 여하튼 그것은 근본주의자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잘못된 비난에 대한 충분한 반박의 예가 될 것이다. 단지 근본주의나 전통적 개혁교회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의 단체로서의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뿐이다. 

한국의 소위 교회지도자들은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활동해야 할 것이며 그것들이 관심을 두는 문제들을 바르게 직시하고 성경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신복음주의의 타협적 죄악을 어떤 말이나 글로든지 가리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이단 사상들이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과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실 혹은 배신이다. 적은 누룩은 온 덩이에 퍼진다. 교제의 작은 오류는 마침내 온 기독교계를 부패시키고 말 것이다. 유다왕 여호사밧 자신은 경건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왕 아합과의 그의 잘못된 교제는 마침내 유다 왕국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부패시키고 말았다는 성경 역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건전한 화합인가? 

1950년대 말 에큐메니칼운동에 따른 예장 교단의 분열의 여파로 1961년 분열의 아픔을 맛보게 되었던 서문교회와 제이교회는 40년만에 설립 90주년 첫 강단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서문교회의 이성헌 목사와 이상민 목사, 그리고 제이교회의 강홍준 목사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찬양을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서문교회와 제이교회는 더 이상 남남의 교회가 아니라 형제교회가 되기를 약속했고, 이들 교회는 올해 연합체육대회와 성가대교류 등을 실시하기로 했으며, 현재 교육관을 건축하고 있는 제이교회를 위해 서문교회는 헌금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였다("40년 분열의 담 허물다," 기독신문, 2002. 6. 26, 10쪽).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예장합동측 교회들의 잘못된 강단 교류의 또하나의 예가 되었다. 예장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은 이유가 있는 분열이었고 그 이유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예장합동측은 적어도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켜오기 위해 애써왔다. 그것은 고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수고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장통합측은 그 노선이 달랐다. 그들은 자유주의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을 용납했고 성경 유오설과 모세 오경의 문서설 등을 용납하였다. 그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장로교단인 미합중국 장로교단과의 교류를 계속해왔다. 우리는 예장통합측 교단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교단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불건전한 교단이라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분열의 이유가 있었고 우리의 교제나 강단 교류가 불가능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이유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제하고 강단교류를 시행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교단의 지도적 교회, 지도적 인사가 그런 일을 앞서 행하는 것이 바른가? 이런 중대한 일을 잘못 행함으로써 파급되는 교단의 급격한 해이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예장합동측의 깨어 있는 목사들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판단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협력선교 개념 

기독신문 '교단 활성화 기획--(4) 올바른 미래 선교 대비'라는 글에서, 노충헌 기자는 21세기의 선교 방향을 (1) 미전도종족 선교, (2)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 양육, (3) 협력선교라고 요약한다. 특히 그는 협력선교에 관하여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협력사역에는 인색하다. 한 예로 선교사 자녀수련회가 있다. 최근 예장통합 선교부에서 예장총회측과 선교사 자녀 수련회를 합동으로 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했다. 선교사 자녀수련회를 교단의 특색에 맞취 따로 할 필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자녀수련회를 독자적으로 열 수 있는 단체가 국내에 거의 없다는 실정을 감안할 때 수련회 대상을 좀더 개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기독신문, 2002. 6. 26, 9쪽). 

그러나 우선, 예장합동측 교단신문에서, 그것도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논설의 지면에서, 교단의 책임 있는 직책을 가진 인물이 아닌 일개의 기자가 교단의 방향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논하였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협력선교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어야 한다. 그 원리는 무엇보다 선교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활동이 신학적 건전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장통합측과의 교류 문제는 그 교단이 신학적으로 건전한가라는 문제에 달려 있다. 통합측은 1959년 합동측과 분리된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적 장로교단인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와 계속 교류를 가져왔고, 성경유오설, 모세 오경의 문서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등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용납해왔다. 그러므로 예장통합측은 신학적으로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장통합측과의 교제나 연합 활동 전반에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그 교단과의 협력선교는 물론, 선교사 자녀수련회 등도 옳지 않다. 교단신문의 역할과 영향은 참으로 중대하다. 교단신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방향을 지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죄가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연합'인가? 

예장합동측 교단신문인 기독신문 2002년 1월 23일자(1쪽)는 미국의 개신교 9개 교단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CUIC)라는 명칭의 단체를 형성한 일을 보도하면서 '아름다운 연합'이라는 큰 글자의 제목을 붙여 보도하였다. 그 9개 교단 속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 미국 연합감리교회, 미국 성공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40년 전에 조직된 '연합하는 교회 협의회'(COCU)라는 단체가 좀더 발전적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연합이 '아름다운 연합'인가? 물론 이 글을 쓴 김지연 기자는 신학적 분별력이 없는 평신도 기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단 신문의 편집국이 그것이 아름다운 연합인지, 배교자들의 연합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신문이라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를 취급하는가? 이것이 개혁신앙의 보수라는 사시(社是)에 맞는 일인가? 기독교 신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큰 악을 행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9개 교단의 연합은 아름다운 연합이 아니다. 거기에는 보수적 교단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인정하지 않으실 배교자들의 연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에 불과하다. 

 

정말 '사람의 생각'이었나? 

대구 서문교회와 제이교회의 '강단 교류'에 대해 한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제이교회를 방문했던 서문교회 이성헌 원로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만약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지금 온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어느 신부의 말을 인용하면서 "43년전 우리가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사람의 생각이었음을 고백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교회 일치를 향하여 가자"고 역설했다고 한다(기독교 연합신문, 2002. 7. 7, 18쪽). 

정말 1959년의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사람의 생각이었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분열을 원치 않으시고 온전한 일치를 원하시는 줄 안다. 그러나 참된 일치는 신앙 사상과 입장에 있어서의 일치이어야 하고 거기에는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 당시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그리고 좀더 깊이 들어가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사상과 입장의 첨예한 차이와 대립이 있었다. 세계 교회는 이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첨예한 차이와 대립을 경험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이 논쟁은 미국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겪어야 했던 논쟁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뒤늦게 그런 싸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 두 상이한 신앙 색깔은 화합할 수 없었고 현재도 이후에도 영원히 화합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믿는 자들은 그것들을 부정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분열의 실제적 원인자이었든지 간에,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불필요했던 인간적 싸움이 아니라 불가피했던 진리의 싸움이었고 갈등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지 인간의 생각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당시의 자유주의적 입장과 보수주의적 입장의 갈등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뉘앙스가 있다. 만일 오늘날 고 박형룡 박사가 살아계셨더라면 그는 참으로 통분하며 이런 발언을 반박하셨을 것이다. 합동측 교단을 세웠던 보수적 선진들의 그 노력과 수고가 과연 인간적 생각을 위한 일들이었단 말인가? 오늘날 합동측 교단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왜 이런 변질된 신앙 입장을 보이고 있는가? 합동측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야 한다. 

예장 통합측은 초창기부터 교단 신학교(장로회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왔다. 이미 그 교단의 상당수 목사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줄 안다.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용납할 만한 현대적 표현 양식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지극히 변질되고 악화된 하나의 이단인가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면 자유주의를 용납하는 예장 통합측 교단은 교제와 일치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치 않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 역사상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이단이다. 그러므로 통합측 교단에 대한 무분별한 용납은 매우 심각한 오류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고신 교단에 분별력이 있는가? 

기독교보 1997년 7월 5일자(3쪽)에 고신총무 심군식 목사는 "연합운동의 자세와 방향"이라는 글에서 사회적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두 성향을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 단합된 연합 운동과 사업으로 현실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고신총무는 2천년 교회역사상 전무한 현대 자유주의 교회들의 사상적 변절과 혼란을 알면서 하는 말인가? 사회문제를 위해서는 배교자들과도 연합할 수 있는가? 더욱이 오늘날 가장 심각한 사이비가 자유주의 신학임을 아는가? 성경은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물리치라고 교훈하였다(롬 16:17; 유 3). 고신 교단은 초기에 가졌던 바른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 

 

고신 총회, 2000년 장로교 대회에 참가하기로 

기독교보 2000년 4월 1일자(1쪽)에 의하면, 예장 고신 총회 임원회(총회장 조긍천 목사)는 200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한국 장로교 대회에 교단적으로 참가하기로 했고 한국의 장로교가 함께하는 연합 행사에 교단이 적극 참여하여 장로교 연합과 성장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신 총회 임원회의 이러한 결정은 비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입장이다. 고신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본래의 순수한 입장을 지켜야 한다. 

 

고신 교단신문의 잘못된 연합정신 

예장 고신 총회의 교단신문인 기독교보 2002년 1월 12일자 사설에서 "연합운동에서 고신의 위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이는 작년 12월 28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고신의 후보가 패배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하여 고신이 연합운동에서 해야 할 일과 한계를 분명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 . . 고신은 신학적으로 다른 보수교회처럼 교회의 연합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 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교회관은 교부들의 신학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 교부들의 신앙고백은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속에 교회관의 핵심이 담겨있다. 교단은 많으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분열주의자'도 '분열주의적'도 아니라는 것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고신 목사 중에 연합에 인색한 자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개선해야 한다. . . . 우리는 연합운동에 내놓을 만한 리더십[지도력]도 돈도 없다는데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3쪽). 

나는 위의 글을 읽고 연합에 대한 고신 교단신문의 정신이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심히 통탄한 마음을 가진다. 우리 나라의 진실한 많은 목사들은 총신이 넓은 길로 갈지라도 고신만은 성경 교훈에 바로 선 좁은 길을 걷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종종 고신의 목사들이 잘못된 연합 운동에 관련된 것을 볼 때에 실망적이었으며 이제 이런 교단신문의 사설을 읽게 되니 더욱 실망이 크다. 

고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연합적 인식 혹은 연합 정신의 부족이 아니고 잘못된 연합 정신을 버리고 바른 연합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사설을 쓴 이는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것이 바른 교회관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관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배교적 사상보다 더 배교적이다. 자유주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성경의 신적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 승천, 재림, 마지막 심판과 지옥, 죽은 자들의 부활 등을 믿지 않는 명백한 이단이다. 천주교회로부터의 분리가 단순히 '분열주의'가 아니듯이,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배교적 교단들로부터의 분리는 이 시대적 요청이다. 바른 연합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한 연합이다. 

예장 통합측은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교단이다. 그 교단은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그런데 고신은 어찌하여 그런 교단과의 교제를 문제 있는 교제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것인가? 고신은 어찌하여 '분열주의'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오히려 악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고신의 초기 선교사들은 소위 메이천파 선교사들이라고 불리웠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분리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확신하였었다. 

오늘날 고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잘못된 교제를 청산하고 한국 교계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한 교단들 간의 교제를 주도하는 것이다. 한기총은 한국의 보수교단들의 연합체가 아니다. 그것이 한국의 보수교단들의 연합체가 되려면 예장 통합측을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배제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며 오히려 오래 전부터 기장과 기감 같은 자유주의 교단들까지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보여왔다. 이런 한기총이 어찌 보수교단들의 연합체가 되겠는가? 고신은 한기총을 갱신하든지 참신한 보수교단들의 협의체를 만드는 일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신 교단 총무의 사상 

고신 총무 전호진 목사는 기독교보의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 특집의 "외국 교회와 고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의 신앙 사상과 입장을 나타내었다. 

 

첫째로, 그는 현대교회의 연합운동과 오순절 운동의 문제점에 대한 비평적 인식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20세기 기독교회의 주요한 특징과 현상을 선교운동과, 연합운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오순절 운동 등 세 가지로 요약하면서, "그런데 복음적 개혁주의 기독교는 선교운동은 나름대로 발전시키지만 신학적 정통성을 강조한 나머지 연합운동에 인색하였고 오순절 운동을 멀리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의 특징으로서의 연합운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넓은 운동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그것은 건전한 성경적 연합운동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교회들이 그런 류의 연합운동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었다. 또한 오순절 운동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건전한 이해에 기초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바른 입장이다. 그런데 보수적 교회의 바른 입장을 '연합운동에 인색하였고 오순절 운동을 멀리하였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둘째로, 그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를 신학적으로 편협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ICCC는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으로 인하여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문제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도대체 국제기독교협의회의 신조나 강령을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국제기독교협의회의 신조와 강령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다. 거기에 어떤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이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나 신복음주의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엘리야나 미가야가 그러했듯이 대중의 사상이 넓고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 지도자 칼 매킨타이어 개인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제기독교협의회의 입장을 '너무 지나친 신학적 편협성'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적 기독교회는 성경적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해야 한다. 

 

셋째로, 그는 진리 운동의 규모에 대해 인간적 위축감을 보인다. 그는 고신 총회가 국제개혁파 교회대회(ICRC)에 가입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보이기보다는 "그런데 ICRC는 너무나 적은 개혁파교회의 대회인지라 세계적 연합기구라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의 기독교계의 현실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세계 기독교회는 지금 배교와 혼란의 와중에 있다. 많은 교회들이 이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 자유주의 이단 사상은 역사적 신학교들에 침입해 들어와 있고 그 신학교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은 연합기구라 할지라도 바른 정신, 바른 입장에 서 있는 기구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귀한 것이다. 성경 역사나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진리 운동은 수와 규모의 크고 많음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귀히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악을 포용하고 악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넷째로, 그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를 교회 활동의 한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는 말하기를, "50년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을 30여년간 봉사한 존 매카이 박사는 명예박사를 무려 25개나 받았는데, 그는 세계적 신학자로, 선교학자로 나아가서는 WCC를 조직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앞으로는 고신 교단도 세계적 안목을 가진 지도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하였다. 50년대의 프린스톤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교이며 존 매카이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또 WCC는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불건전한 단체이다.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 보수 교단의 총무가 자유주의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자를 모범으로 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수적 교회들에 인재가 없으면 없는 대로 가야 한다. 자유주의 교회들에게서 모범을 찾을 필요가 없고 찾아서도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계적 활동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바르고 신실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고신 교단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교단 지도자들과 특히 교단 총무는 고신의 보수적 신앙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고 지킬 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고신의 순교자적 뿌리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고신은 본래 그런 교단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신은 실망적인 일이 많다. 아직도 허순길 박사 같은 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주장과 입장이 고신 교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고신은 본래의 정신과 분별력과 입장을 회복해야 한다. 

 

이성구 교수의 연합주의 

고신 기관지인 기독교보의 교단 설립 50주년 기획 특집에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인 이성구 목사는 "한국교회 연합운동과 고신"이라는 글에서 연합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노출하였다(기독교보, 2002. 9. 7, 6쪽). 그러나 그의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우선, 그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의 교파적 확신을 무시하고 매우 불필요한 것들이 한국에 이식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여러 교파로 나뉘인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면서 "서방의 교회전통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옮겨졌을 따름이다. 얼마든지 하나의 '한국기독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으나 이미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 . .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의 달라져 있던 전통의 교회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우리가 교파적 차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교파적 차이는 역사상 불가피하였다. 교파적 차이점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계속 필요하지만, 그것들을 무시하고 한 교회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천진난만한 생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교리적 통일성이 없이 하나되는 것은 겉보기의 하나에 불과하고 내면적 갈등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파가 나뉘거나 새 교파가 형성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연약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등의 교파는 분명한 교리적 확신의 차이 때문에 생겼다. 신학 교수가 그런 교파적 확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지 매우 의아스럽기만 하다. 

또 그는 예장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을 교회 정치 혹은 교권 장악을 위한 싸움의 결과라고 본다. 그는 말하기를, "고신과 기장이 떼밀려 나가고 남은 장로교가 다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된 것을 두고 흔히 교회 정치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한다. WCC에의 가담여부가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알려진 분열의 이유이다. 그러나 '총신 90년사'를 쓴 김요나는 승동측(합동)과 연동측(통합)의 분열의 이유를 네 가지로 들고 있고, 그 중에 WCC와의 관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계략을 동원하여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 일어난 분열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적 안목을 가졌거나 흐려진 보수주의적 안목을 가진 자의 발언과 같다. 자유주의 자들은 WCC문제가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은 보수주의적 합동측 인사들의 주장에 결정적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오늘날 분별력 없는 보수주의자들도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WCC가 분열의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신의 입장이었는가? 보수주의의 본질은 교리의 순수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다. 고신의 보수적 입장은 어디로 갔는가? 어찌하여 보수주의적 교단의 신학교수가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선진들의 투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가? 

그 다음, 더욱 본격적으로, 이 교수는 자신의 연합의 생각을 피력한다. 그는 최근 고신의 인사들이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함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최근 들어 우리 고신은 한기총, 한장연(한국장로연합회) 등에서 상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 . 최해일 목사가 사상 처음으로 한기총 대표회장에 출마하고, 여러 교회들이 회장에 당선되면 활동을 후원하기로 합의하면서 연합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려 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고신이 연합운동의 주류에서 멀리 있는 것을 안타갑게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대한성서공회가 '개역개정판 성경'과 '표준새번역'을 발간할 당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오병세 박사를 위원장으로 세우기도 했지만, 여전히 KNCC 비가맹 교단인 고신은 소위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과 상관이 없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을 맡았던 김경래 장로, 한국 시민운동의 대부격인 손봉호 교수, '한국기독교회사를 정리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건전한 기독교적인 이론을 집성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만열 교수 등 연합운동에 기여한 개별적인 고신인들의 활동을 칭찬한다. 또 나아가, 2001년 11월 한목협을 통해 창설된 22개 교단장 연합기구와, 그 기구를 통해 시작된 '한국교회 대표기구 단일화' 운동에 고신의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 또 각 지역에서 고신의 목회자들이 지역교회 연합운동, 연합사업에 활발하게 동참하고 있는 것을 매우 고무적인 일로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교수의 사상이 오늘날 고신의 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비평받아야 마땅하다. 연합 운동에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는 교회 역사상 전무한 가장 파괴적인 이단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적으로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 심각히 침입해 들어와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라고 강력히 비평하였던 것이 성경적인 보수교회들의 입장이었고 고신의 입장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이 죽었는가? 교회들이 자유주의 이단을 제거하고 새로워졌는가? 어떻게 보수교단의 인사들과 신학교수가 정신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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