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을 대하면 참 편하다. 농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농담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농담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서양철학은 참 진지하고 심각하다. 신(神)의 뜻과 어긋나면 비진리라고 심판받아 절단 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당하는 인간만 손해다. 따라서 진리를 캐고 또 캐나가는 식이다. 동양철학은 그게 아니다. 풍류를 즐기면 그만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다. 누가 자기를 심판할 자가 없다.
교회는 서양철학이라면 절은 동양철학에 기초로 하고 있다. 중이나 절에 다니는 불자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이 분류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행”이란다. 풍류를 여유 있게 즐기고 있는 자신들을 악한 자라고 몰아세우니 기분이 더럽다. 아니, 그 누구로부터 분류당한 것 자체가 괘씸한 상황이다. 절 쪽에서 교회를 우대하고 같은 종교인들이라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저 교회 쪽에서 이미 자신들을 분류시켜 놓은 채로 대화하겠다니 이게 무슨 공평한 대화가 되겠는가! 차라리 꼼짝 말고 내 설교나 일방적으로 들으라는 식으로 항복을 강요당하는 느낌일 것이다.
동양철학은 누구를 대하든지 분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류할 만한 절대적인 기준 자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이냐?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다”이다. 인간이 곧 진리요 인간이 곧 신이다. 따라서 같은 신과 신끼리 만나면서 상대를 존중하면 그만이지 무슨 새삼 분류작업이 필요하단 말인가! 동양철학에 있어 완벽이나 우수나 훌륭함이란 딴 게 아니라 자아를 상대에게 들이대지 않고 미리 자연스러움 속에다 자아를 녹여 없앤 상태에서 상대를 대하는 고매한 인격을 말한다. 즉 도를 많이 닦으면 자연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으로 충만하기에 누구를 대해서 자기 위주의 ‘분류하기’, ‘심판하기’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모토다.
즉 “우리 서로 분류하지 맙시다.”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동양철학 쪽이라면, 서양철학은 “비진리를 제거하기 위한 사명으로 만납시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즉 서양철학에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립다. 그렇고 그런 사람 만나봤자 서로 이용할 건수만 챙기는 수완들이 이제 지겹기만 한 것이다. 서양철학 하는 동양철학 하는 사람을 만나봤자 진리가 나올 건덕지가 없고 그냥 늙기 전에 세상이나 실컷 즐깁시다 는 식으로 나올 게 뻔하다 때문에 만나고 난 뒤에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는 죄책감이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철학 하는 자들은, 상대가 과연 진리를 아는데 쓸모 있는 구석이 있는지 미리 측정하고 판단하고 분류한 다음에 만나게 된다. 부질없이 시간을 낭비하면, 그 낭비된 시간만큼 자신이 진리에 좀 더 가까이 갈 기회를 늦춘 게 속상한다.
요즈음 불교계가 화를 내는 것은, 자신들이 더불어 존경받을 인간이기도 전에 먼저 분류당하고 심판당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에 있다. 즉 공직 사회에서 불교신자로 행세하는 것이 조직 융합 차원에서 장애요소가 되는 것으로 분류당할 수가 있기에 주류 노선에서 배제될까봐 노심초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에게 직접 피해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절 유지에 자금줄이 되는 일반 불자들의 사회적 처신이 좁아져서 결국 절 유지가 안 된다. 풍류를 즐기려면 자기 대신 힘들게 돈벌어주는 자와 연줄이 닿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즉 돈 버는 자들에게 있어 현실 자체가 무척 진지하지만 정작 돈쓰는 자에게는 세상 모두가 다 농담일 뿐이다. 이 농담을 농담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생존’이라는 진지함을 결코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자들의 앞선 포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들은 말한다. “제발 분류하지 말자!”이고 여기에 더 적극적 의미를 담는다면 “단결!”이다. 분류하면 단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아직도 진리를 운운하면 자연적으로 분류가 일어나니 참으로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외치지 않는 그런 기독교가 되어서 상생하자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이게 어디 종교 대 종교의 만남에서만 일어날 현상인가. 소위 기독교라는 내부에서도 그러하고 소위 복음만을 외친다고 자부하는 인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관심사가 복음이라는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온 신경을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풍류를 즐기는 동양철학적인 기분으로 “감히 나를 분류하려들지 말라”고 외친다면 절의 중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줄기차게 미끌어진다. 자력으로 가까이 가려다가 말씀에 의해서 늘 발길질 차인다. “너는 인간도 아니다!”고.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죄인을 긍휼로 인도하여 십자가가 보이는 곳으로 되모아주신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을 통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 하게 된다. 이것은 성도의 분류가 아니라 예수님의 분류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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