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모임 때 성령의 역할을 책망이라는 단어로 압축했었습니다. 그 책망은 바로 지금 이 곳에 성령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떠남 때문이고 예수님의 떠남은 인간의 떠밀어 냄이 바로 그 원인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부재(不在)'의 상징이며 동시에 17장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으로 하나 됨의 장소(처소)의 마련입니다.
성령은 마치 애굽을 떠나게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자기 자신이 이미 애굽이었음을 깨닫아야 했고 그 결과 하나님에 의해 죽음을 덧입혀야만 했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죽음을 전제로 깔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죽음에 포위된 채로만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가나안 땅, 성령입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은 그 땅의 주인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늘 상기시킵니다. 성령은 지금 성도에게 성령이라는 터전이 누구의 것인가를 상기시킵니다. 그 첫번째가 책망이었고 그와 연결된 두 번째가 바로 피해자의 이름을 자꾸 가해자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이름 부르기, 다시 말해 이 땅의 진짜 주인의 이름, 그런데 종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 이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로 그 땅 주인의 죽음 덕분에 새롭게 살게 된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린 그 이름을 자꾸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 :13, 14, 15)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듣는 것만 말씀하십니다. 그럼 누가 성령에게 듣도록 하시는 겁니까? 바로 죽임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것만을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의 이름을 자꾸 가해자들의 귀 전에 때리는 것입니다.
어느 교도관이 수감 중인 살인자에게 그가 죽인 피해자의 이름을 자꾸 부릅니다. 살인자에게 그 이름의 역할은 바로 자기 자신이 살인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키는 것입니다. 교도관은 그 이름을 통해서 살인자를 살인자로 포위합니다. 내가 살인자 이지만, 교도소에서 그 죄 값을 지불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개선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제 다시는 살인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도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내가 그 이름을 죽인 자 맞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마치 교도관처럼 성도에게 예수만 생각나게 합니다. 그에게 듣은 그의 영광, 그의 것만을 고집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외에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살인자가 자신은 원래 괜찮은 존재이고, 결코 태어날 때부터 살인자였을리 없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늘 가능성을 도모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성령은 성도를 처음 제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됨은 누군가의 피 때문에 오직 이것 때문에 파생된 결과라는 것이 매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어야 머리되신 분이 머리되셨고 지체된 자가 별도의 주체가 아니라 머리됨을 증거하기 위한 지체로서 제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를 이렇게 자꾸 제자리로 돌려보내면서 예수의 이름만을 상기시킬 때 그 이름의 의미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과 성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 24)
우리의 속성상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하여 부르고 계신 "너희"가 따로 존재하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의 속성을 활활 불타오르게 하는 말씀이 뒤따라 나옵니다. 바로 이런 말씀들이 우리가 왜 예수의 다른 것이 아닌 그의 피말고는 다른 희망이 없는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 26, 27)
마치 너희가 있고 예수님도 따로 있는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 죽인 자 들이 피해자의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을 피해자가 심부름 해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와 나 예수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분 대립된 존재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합체시킬 때 비로소 가능한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바로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자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이제 내 이름 즉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 사랑과 그가 주시는 믿음이 담겨지는 그릇역할을 합니다. 그 그릇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를 믿는다 것이 더이상 추상적이고 기준없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예수님의 피에 의해 사랑받았다고,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분이 분명하다고 믿어지는 이상한 존재들에 의해서 특정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한 존재들, 새로운 피조물들은 오직 가해자를 용서하는 진정한 피해자이신 예수님만 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 많으신 분입니다. 힘이 아주 셉니다. 인간이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진면목이 바로 하나님 제거라는 것을 공개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지목된 어린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에 의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된 자들이기에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떨어지는 낙하지점 역시 그의 이름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피해자의 이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고 확인하고 또 부르고 책망하면서 그 이름은 이제 책망의 이유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이죠.
성도라고 하면서 성도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성도에게 무엇을 내 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에게 당신에게 나올 것이 죄 밖에 없음을 서로에게 메아리처럼 울려 주면 그 뿐입니다. 감사조차 내놓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찬양도 그 성도됨으로 인해 당연히 소유되는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시작되어 성도를 경유하고 결국 다시 주께서 돌아갈 피 사랑의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늘 이 증거물을 수거하고 성도에게 다시 적용합니다. 그래서 감사조차, 찬양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없어진' 나를 예수의 이름 속에서 다시 '발견'합니다. 없어진 나를 발견합니다. 즉 피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 처소의 이름이 '성령'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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