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사귐), 동행(함께 하나됨), 형상(닮은 꼴)을 보기 위한
심판의 자리에 몰림당함
이상규 집사님이 웃사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를 듣고 다시 질문을 했다.
왜 웃사가 죽을 수 밖에 없는가?
그러나 사실상 웃사 자체의 행동 때문에 벌어진 죽음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의 죽음을 통해서 그 죽음을 해석할려고 달려든다.
이미 죽은 놈 뒤통수 치듯 씹어대 본들 죽은자가 반박을 하겠는가? 덤벼들겠는가?
죽은자 보다 해석하고 판단하기에 딱 좋은게 없다.
산자는 곤란하다. 그 판단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까봐 선뜻 산자를 향해서 해석을 적극적으로 나설려고 하는 이는 좀처럼 잘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살았다와 죽었다 앞에서 자신을 살았다는 기준으로 두고 죽음을 해석한다.
죽음을 왜 해석할까? 자신이 살았다는 반증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돋보이고파 하는 이유이다.(바리새인 앞에 실로암소경은 딱 좋은 해석꺼리요 연구재료다. 이미 죽은자와 방불하다. 죄 연구 잘하면 성과물이 생김으로써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와 심지어 하나님까지 연관시켜 유익이 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 앞에 그들은 도리어 그 생각들이 악마적임이 드러나도록 동원된다.)
또 그 해석이 명쾌하고 명해석이 되면 자신이 죽어도 그 명해석이 남아서 사람들에게 길이 길이 이어지는 역사 곧 신화가 될 수 있기에 영원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지옥 그리고 죄 (병든 인간)]
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할려고 달려 들었다가 병들어 죽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앞으로도 이 실제 상황으로 닥친 죽음이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달려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도 풀은적도 없고, 지금도 해석 불가이며, 앞으로도 풀었다고 나타날 인간은 없다.
(죽음도 못 풀면서 화친을 이룬다? 심판도 못 통과하면서 구원을 바란다? 저주도 모르면서 어찌 사랑을 알겠는가?)
도리어 더 깊어진다. 참 신비롭게도 죽음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뽀드락지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음성적으로 은폐되고 숨어버린다.
율법이 그러하다.
모든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고자 율법이 주어졌는데 여기저기서 자신은 행할 수 있을 정도로 행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너무 너무 많이 나타난다.
그들이 농땡이 부려가면서 율법을 행했겠는가? 천만의 말씀.
누가봐도 자부할만 하다는 증인들을 앞장세우면서 등장한다.
저 사람의 행함은 가히 칭찬받을 만해 라는 자발적인 주변의 목격담과 그 근거로 인해서
철저한 타당성을 가지고서 등장한다. 그것도 건전하다 라는 이름의 검증과 검증 아래서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도바울의 열심
어제 설교의 예레미야의 정의와 공의를 주장하는 마음
그리고 엘리야의 나만 남았습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으니 차라리 죽여달라.
다윗 또한 법궤로부터 오는 그 복을 자기 쪽으로 땡기고픈 그 마음
모세가 도저히 못참아서 이래도 못 믿겠는가? 기적 또 보여줘? 봐라 실컷 봐라? 라고
안 믿고는 못배길 것이다 라고 해서 주어지는 바위를 두 번 쳐서 주어지는 갈증을 해소하는 신령한 음료
이 모든 것이 율법성에 갇혀서 나오는 완악함이다.
그 모든 것을 누려 본들 다 배설물이다.
죽음을 통과할 길이 없다. 모조리 죽음을 비켜가고자 주변에서 맴도는 짖 밖에 안된다.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일 뿐이요 완악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마음은 무엇인가? 화평 곧 사귐과 함께 하심의 동행
그리고 흔히 성화론자들이 사기쳐 먹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무엇인가?
매우 매우 간단하다. 너무 너무 간단하고 쉽고 어린아이도 다 아는 것이라서 무시한다.
일체 가치 있다고 여길 수가 없다.
가치성이란 항상 자신의 이해력을 가미 시킴으로써 나오는 결과이기에 자신의 것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무시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즉 아무것도 내가 가미 시킨 적이 없고 도리어 소외되고 배제 당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진짜 유일한 가치있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요, 우발성이요, 잉여요, 처음부터 완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랑한 것이다 라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반드시 [아니요] 라는 개념을 집어넣어서 나오는 상대적인 의미로써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상대적인 자리인 [아니요]의 자리에 앉혀지지 않은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다.
바로 이것을 완악한 자들은 누락 시키고 빼버린다. 감해버린다.
또 잔머리 굴리는 놈들은 그 [아니요]의 자리에 넙쭉 앉아버린다. 더해버린다.
자기가 자신에게 손대고야 말겠다는 심뽀이다.
(베드로가 그러했다.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서자. 그가 질책받은 행동에 자연스럽게 자신은 반대의 행동을 한적이 있다고 여겨서 그 빈자리에 넙쭉 앉아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비켜가버리신다.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복음에 가미 될 수 없도록 하신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는 다 봐야 할 입장이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와의 차이성을 그 두 모습이 반드시 나타남으로써 알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
선한 목자가 전혀 선해 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담 백배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을 상대적인 늑대가 양을 등쳐먹는 일과 대조해서 드러내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즉 인간 자신의 기준에서 선함이란 그렇다면 목숨 버릴게 아니라 늑대가 늘 있기 때문에 목숨 버리지 말고 늘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늘상 해주어야만 하지 혼자 영웅 노릇하고 떠나버리면 남은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계속 곁에 동행해서 늘 지켜 주어야 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늑대를 주변에 깔아 놓는다. 그 빈자리를 늑대들이 다 차지 하도록 하신다. 정작 평강이다, 화평이다, 사랑이다, 절대로 저주 없다, 심판 없다, 버림이 아니라 선택이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뿐이다, 유기가 아니라 구원이다, 절대지옥이 아니라 절대천국이다 라는 소리만을 외치면서 웃음띤 미소와 다정다감함과 어려움이 닥칠 때 언제라도 뛰어나와서 목숨걸고 도와주는 섬김으로써 삯꾼 노릇을 어쩜 그리 주님이 시키신대로 딱 맞게 해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양 뿐이다. 정 선한목자 사랑하고 보고싶으면 그 길을 따라 가면 된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다. 따라갈 능력이 없다.
도리어 삯꾼들이 자신들은 따라갈 담대함이 있다고 시범까지 보이면서 놀려댈 뿐이다.
그저 무능함 뿐이다. 그 무능함을 깨우쳐 주겠다고 성화론자들이 발벗고 나선다.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할 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일체 나오질 않는다.
나오면 큰일 난다. 나와 봤자 지옥이다. 천국은커녕 지옥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사탄아 너가 지금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의 계획을 가미시킬려고 하고 있느냐? 사탄아 썩 물러가라 !
좀처럼 베드로의 다가감과 사귐(화친)과 동행과 닮아보고자 하는 형상 따위는 일체 거부당한다. 도리어 마귀 라고 욕만 대따 배터지도록 먹게 될 뿐이다.
바로 이 일치성이 아닌 차이성을 곧 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웃사는 죽어야만 했다.
웃사는 의도적인 행동도 아니였고, 그 어떤 원인도 웃사에게서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생판 남인 다윗을 통해서 그 죽음이 해석이 된다.
아니 사실상 다윗도 아니다. 다윗과만 차이나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유일한 단 하나의 해석이 나온다.
즉 영의 일이다.
성령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이란 (여기에 동원되는 선지자, 은사, 천사 등등의 하늘의 것)
반드시 땅의 실체 육의 실체 어두움의 실체를 파재낀다.
베드로의 다가고자 하는 그 친화력인 사귐
사울(사도바울)이라는 청년의 율법으로부터 흠이 없는 저 열심
엘리야의 내 열심히 특심이다는 자신만이 남았다는 하소연
예레미야의 공의와 정의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라는 물음
다윗이 이름 없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눈물의 회개와 금식
누가 봐도 선하게 보이는 그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고
그 실체를 파재끼는 성령(하나님의 영광)이 덮쳐보니
선하기는커녕 똥내나는 악취였고
더럽기 짝이 없는 역겨운 썩은 오물이였다.
바로 그런 실체를 파재껴짐을 당하기 전까지는 거룩하다 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도리어 악취였고 썩어 빠진 것이다.
차라리 인간들 다수가 더럽다 라고 한 것이 주 앞에서는 훨씬 깨끗했다.
바로 이것을 격도록 하는 것이 선한 목자의 취지이다.
창녀와 (더럽게 돈 벌고 더럽게 하나님이 주신 몸뚱아리를 팔아서 생존을 유지하는)
세리가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팔아서 자기 입만 챙기는)
먼저 하나님 나라가 간다고 했다.
결국 그 동안 인간들에게 해석되어져 온 하나님 나라가 엉터리 해석이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해석 되어져 온 율법, 율법의 열심, 행함, 믿음, 성전, 메시아, 하나님, 성령, 이스라엘 그 모든 것들이 다 엉터리 해석이요 버릴 판국에 놓여진 것임을
깨끗하고 절대로 불의함이 없음을 추구하는 자아가 도저히 용납 못하는 창녀와 세리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집어 넣는 그 예수님을 새로 만남으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야 할 판국에 놓였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성화론자들과(왜? 성화론자들은 자신들이 한국교회와 분리되었다고 인식하기에) 그리고 개혁주의(수준 높은 건전한 개혁, 수준 낮은 개혁, 온갖 잡탕들이 다 모인)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원 받은 강도(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염치없이 낼름 구원만 딸랑 챙긴 한국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자 = 왜? 조직 시스템을 갖출려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꾼들의 변명꺼리로 동원 되기에)와
의로운 롯(아무리 봐도 의롭지 않고 그 롯의 의가 교회에 들어와서 퍼질까봐 전전긍긍하기에)
도저히 그동안 해석으로 다루어진 구원과 의에 부합이 되질 않기에
그것만큼은 슬그머니 빼버리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또 앞으로도 도저히 수긍을 못함을 통해서 고맙게도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역시 주님의 의와 구원하심은 어떤 인간들에게도 해석 되어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구원 받은 강도(평생을 강도짖과 살인만 해 온 자)
의로운 롯(평생을 의의 길을 간적이 없는 자)에 대한 해석을 엉터리로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참 신기하다.
그들 보다 훨씬 깨끗하다 의롭다 라고 하는 그 자부심이
주님 앞에서는 차라리 구원받은 강도가 의로운 롯이 훨씬 더 나은 제사요 훨씬 더 깨끗하다 라는 성경의 외침을 그들은 그동안 사기를 쳐 먹고 정작 그들이 더 돈을 세리 보다 더 등쳐먹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늘날도 똑같고 앞으로도 똑같다.
왜 그럴까?
왜 웃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을 옛부대로 낡은 부대로 교체시키는 작업을 주님 쪽에서 실행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사는 죽어야만 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현장에서 간음해야만 했다.
또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그냥 땅에 한순간에 다 허비해 버린 그 창녀는 반드시 그 비싼 향유를 땅에 허비하는 짖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
앞에서 말한바 대로 웃사 자체의 죽음은 의미 없다.
반드시 결합이 되어야 할 인물과 연관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다윗이다. 다윗의 후손이다.
다윗을 역어서 봐야만 하는 다윗의 후손이다.
비로소 동행의 의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보게 된다.
구원 받은 강도 자체의 행동은 의미 없다. 의로운 롯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비싼 향유를 때려부은 여자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동을 자체를 보고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네 또는 하지 말자 라는 취지로 말하는 자들은 거짓선생들이다.
해야겠네 라는 자들은 베드로처럼 또 걸려든다.
하지말자 라고 하는 자들은 하지 않는 의로운 행동을 앞장세움으로써 뒤로는 썩을 것을 감추는 개기로 삼기 때문이다. 예로 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듯이 교회에 돈 바치라는 그 더러운 사기술
아무리 강조해도 그 사기에 넘어갈 사람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졌기에 말릴 필요도 없다.
그들 자체의 행동은 의미 없다.
다만 그들의 그 행동을 가지고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데 사용하는 예수님의 개입만이 믿음이다.
문제는 자꾸 인간이 개입하게 되니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과 충돌해야만 한다.
그래서 베드로 엘리야 예레미야 모세 다윗은 충돌하게 된다.
충돌하지 말자가 아니라 또 충돌하자 라는 말이 아니라
그 충돌로 통해서 교체당하고 우리의 구조를 새언약의 구조로 새롭게 편성한다는 것이다.
행함의 요구가 아닌 세계(근원의 자리, 처음자리) 자체를 바꿔버리겠다는 것이다.
행함과 상관 없는 세계에서 행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느 세계 사람인가?
세계가 바뀌었는데 결코 정죄함이 없는 세계로 바뀌었는데
또 다시 정죄함이 있는 세계로 되돌아 갈려고 하니
헌 술은 새 부대에 들어올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성화론자들처럼 그 말씀을 자기유익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방종을 제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라고 또 자신들의 탐욕을 또 남을 섬기는냥 하고 있다. 고맙게도 악한 영을 받지 아니하면 그 사명도 감당 못한다.)
바로 옛세계와 새언약 세계에 중간에 낑겨서 동시에 심판의 자리에 몰려 새언약인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그들의 운명은 결정이 난 것이다.
결정이 났기에 발버둥을 쳐 주는 것이다. 왜? 발버둥 쳐도 소용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 발버둥 침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더욱더 그 완료성을 잠잠히 변함 없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보다 강하시다.
바로 그 쓰레기 자리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해골의 자리에 몰림 당하도록 일을 벌리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 선지자는 자꾸 자꾸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자리로 몰아간다.
당연히 누가 반발 하겠는가? 이스라엘이 반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은 그 길 뿐이다.
웃사와 충돌 함으로써 다윗과 동행하는 분이 있는 곳으로 몰아 넣는다.
그 다윗의 후손이 바로 저주의 자리에 있다.
그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늘 가짜 하나님의 형상에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고 다 그렇게 속아서 무엇이 형상인지 물에 물 탄 듯이 모호한 소리로 형상이라고 말하는 그 놈도 형상은커녕 이중성만 보이는 그 짜가들이 외치는 가짜 형상인 인간들 속에서
생전 보도 듣고 누가 알려준적 없는 그 하나님의 형상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의 형상 그 당사자 본인이
찾아 와버렸다.
비로소 외친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이 그 동안 우찌 하나님의 형상을 운운해 왔던고?
그 망하는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서는 망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 진다.
선한 목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형상이다.
단 한번도 자기 목숨을 내어준적 없는 인간들이 외치는 형상은 다 가짜였음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은 결국 돈 벌기 위한 또는 자기이미지 관리를 하는 삯꾼들의 형상이였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형상 운운을 했으니
누가 알았는가? 불타는 그 심판의 불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줄?
그 명료한 하나님의 형상을
불 근처에도 간적 없는 놈들이 하나님 형상이라고 모호한 소리로 의문의 소리로
시험의 소리로 사라질 소리로 사기를 친 것이다.
화평은커녕 검을 통해서, 화평과 차이나는 검을 통해 화평 사귐을 보게 되고
동행은커녕 동행 곧 하나됨과 일치성을 추구한다는 그 함께함이 도리어 근처도 못가본 놈들이 외치는 소리였고 정작 동행자는 하나된 분은 일치된 분은 차이나는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서 비로소 동행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내어줌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나와 하나 된 뜻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 된 뜻을 미워했을 뿐이다. 왜? 자기를 소외시켰고 일치는커녕 차이나게 했다는 이유이다. 그 차이성 때문에 다윗을 심판의 자리에 몰아넣고자 웃사를 치신 것이다. 다윗이 봐야할 하나님의 형상이 다윗이 생각한 하나님의 형상을 박살을 내는 형상이 그 심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다윗 이후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종말의 자리로 몰아간다. 몰아가면 갈수록 더 격렬한 반항이 거세게 일어난다. 안일어나면 안 되도록 악한 영까지 부어버리신다.
옛구조를 새언약구조로 바꾸고자 하는 취지이다. 바로 십자가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편성되는 새 구조이다.
이제 정의로울 필요 없이 처음부터 정의로운 세계로 교체 되었고
열심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열심히였던 세계로 교체 되었고
의로울 필요 없이 처음부터 의로운채로 태어난 세계로 교체된
새 세계의 새 피조물이다.
이 새 언약의 시대에 반드시 동원되는 옛언약의 옛구조를 다시 주장하는 자들이 반드시 주변에 깔려야 한다.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고마운 어두움이다.
십자가의 심판의 자리를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동원되는 십자가의 저주자리를 철폐시키고 무가치로 돌려버리는 자들이 반드시 많이 많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화평이다 화평이다.
생명이다 구원이다. 의롭다 성화다 라는
반드시 새언약에 대비되는 옛구조들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전혀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 소식인
곧 심판의 자리로만 몰아넣는 소리를 통해서
이미 완료된 것을 보여준다.
그 당사자들도 매일 매일 교체 당하고 매일 매일 죽음으로 몰리면서 말이다.
사랑이란 곧 성령의 일이란 성령의 은사란
이보다 더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있으면 나와보라 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몰아 넣는 것이다.
십자가 안 만이
인간들에게 널려 있는 모호한 동행과 차이나는 유일한 동행(함께하심과 일치성)이요
인간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모호한 사귐과 차이나는 유일한 화평(넉넉한 승리=나 보다 강하심)이요
인간들에게 지나개나 외치는 돈벌이 형상(우상 이미지=자기유익))과 차이나는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이에 끼여서 두 세계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동원된 소모품 미끼 쓰레기 로써 말이다.
(빌 1:15, 개역)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 1:16, 개역)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빌 1:17, 개역)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빌 1:18, 개역)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9, 개역)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 1:20, 개역)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개역)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개역)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개역)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개역)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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