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령론 요약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개혁주의 성령론 요약

 

서 론

 

현대 한국교회의 성령론에 대한 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교리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는 (장로)교회 조직 내에서는 일견(一見) 어떤 혼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교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성령을 자신들의 필요나 목적을 해결해주는 부적이나 신비한 능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신비하고 기적적인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회자(膾炙)되는 현장을 찾아서 종교적인 갈증을 풀어보려는 노력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성령에 대한 성경적 바른 이해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개인의 경험 위주로 전달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에 저자(著者)의「개혁신앙과 교회」중에서 “개혁주의 성령론”은 성령에 대한 혼란스런 논쟁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평가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성숙을 위한 방향제시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성경신학적 접근으로 성령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또한 전통적 구원의 서정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완함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본 론

 

Ⅰ.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와 성령의 사역

 

1. 정 의

 

구원론(soteriology)이란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을 택자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교의학적으로 논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내 속에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살아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로서, 구원의 기쁨을 말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적으로 성령론은 구원론 속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성령을 떠나서 구원론을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원론이란 성령이 일부분이 아니고 성령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조직신학적 해석은 사변적(思辨的)인 요소를 제공하여 신자로 하여금 진리를 상고할 수 있게 하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중요한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는 약점이 있다. 여기에 장로교와 개혁파 신학의 맹점(盲點)이 있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사라진 상태에서 구원론을 배워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구원론이란 신자의 삶이 구원의 기쁨과 전적으로 직결되어야 하는 것이며, 신자의 전(全)인격적 삶에 실제적으로 그리고 바르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강요 제 3권의 이해

 

칼빈은 그의 강요 제 1권에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를 말할 때 예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제 3권의 1-19장까지 성도의 삶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기도와 예정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조직신학자들은 예정을 신론에 넣었다. 그러나 이는 체계적이지만 동시에 사변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런데 칼빈의 예정은 구원론 속에 있다. 그 이유는 칼빈은 성령의 역동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 속에서 예정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예정이란 만세 전의 택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이미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예정에 대한 감격이라는 것이다. 이 감격은 이미 바울 속에 있었으며 칼빈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예정에 대한 감격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구원의 순서의 성경적 기초

 

구원 순서의 성경적 기초는 로마서 8장 30절이다. 여기서 예정(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이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 예정은 우리에게 직접 지금 적용된 것이 아니기에 구원의 순서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순서는 소명, 칭의, 영화로 이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신자에게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완성은 죽음 직후에 성령의 역사로 신자가 거룩한 상태로 들어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 조직신학의 고백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리스도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데 몸과 영혼이 합해져서 완전한 부활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의 순간에 이미 변화가 되었다. 몸과 영혼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은 재림 때이지만, 그전에도 우리는 일부를 맛보고 사는 것이다. 이를 성경신학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표현을 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신학에서 중생은 “순식간에 되어진 변화”로 사용하지만, 칼빈은 여기에 사람의 반응으로서 회심을 말하는데, 이는 일생동안 회개와 신앙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성화의 모든 것을 포함해서 중생을 사용하는 것이다.

 

4. 구원의 순서의 여러 견해들

 

(1) 개혁주의의 견해

 

박형룡 박사의 구원 순서는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성도의 견인-영화의 아홉단계를 말하는데, 이는 포괄적이며 또한 구원의 순서로서 비교적 완전하다.

 

(2) 루터파의 견해

 

소명-조명-회심-중생-신앙-칭의-신비적 연합-갱신-보전을 말하는데, 특히 성경을 강조하여 “per verbum"(성경을 통하여)을 말한다. 사람 편에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적 요소가 있다.

 

(3) 로마 카톨릭의 견해

 

충족은혜, 주입은혜, 협력은혜를 말한다. 이는 은혜를 받았지만 나중에 타락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선행과 더불어 미사에 참여함으로 은혜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알미니안 파의 견해

 

소명-회개-신앙-의로 전가-중생-성화-견인을 말한다. 이들은 가항적 은혜를 강조하고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5) 칼 바르트의 견해

 

칼 바르트는 구원에 대한 작정을 부인한다. 오늘 선택 된 사람이 내일 기각될 수 있고 오늘 기각 된 사람이 내일 선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택함 받고 모든 이가 유기되었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Ⅱ.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의 의미

 

칼빈은 넓은 의미에서 중생을 말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까지 일생동안 “중생”의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즉 중생은 “죽고 사는 것”으로서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신자는 이 역사를 일생동안 계속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자에게는 아직도 육신을 통해서 죄가 역사하기에 늘 죄에 떨어지기 쉽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작업으로서의 중생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전체 작업을 칼빈은 중생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경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지만 계속적으로 자기를 치고 있음을 증거한다. 목회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자신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여전히 그리스도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로서 “바울신학의 진전(進展)”이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십자가를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면서 은혜에 대한 감격이 깊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늘 자기의 정과 욕심을 죽이고 끊임없이 자기를 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까지 일생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작업을 칼빈은 중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Ⅲ. 성령의 사역

 

1. 구약의 성령사역

 

(1)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개혁주의는 창조-타락-구속의 순서를 말한다. 이것이 성경의 순서이고 역사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역사 개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바르트는 실제 사실(fact)로서의 역사 혹은 사건(event)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게쉬히테(Geschichte)의 역사로 보고 있다. 즉 창조는 실제사실로서의 사건이라기보다 구속역사를 설명하는 설화(saga)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역사의 진전에 따라, 구약의 성령의 역사, 신약의 성령의 역사를 구분하여 말할 수 있고, 이 중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고찰되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2) 구약시대 성령의 재창조 사역

 

구약에서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혁주의는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따라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구약의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았다. 모세와 다윗도 율법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들었다.

 

이것이 구약이 보여주는 성령의 재창조의 사건이다. 구약에서 성령이 떠났다가 들어오는 것을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면 곤란하다. 삼손의 경우 성령이 떠나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사사 또는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는 직무와 관련된 표현이지 구원과 관련 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성령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성령의 재창조의 사역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즉 오순절 사건은 교회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보다 신약교회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론의 바른 고백이 될 것이다.

 

2. 신약의 성령사역

 

신약의 성령사역의 특징을 말하려면 우선 신약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구별이 필요하다. 신약의 전반부는 복음서로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밀착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께 집중적으로 역사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아직 약속으로 또는 미래의 선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후반부, 곧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완성으로서 천상사역의 시작과 계속을 말하고 있다.

 

(1)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사역

 

신약의 전반부인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사역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상사역의 시작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따른 가장 완전한 순종이요, 참된 희생이요, 구약시대의 율법에 따라 드린 모든 제사들의 완전한 완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포로와 같이 매인 데서 구속하기 위한 속전이요 대속물이었고, 새 언약의 초석이요, 거룩하고 완전하여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서 자기백성의 죄에 대한 속죄의 원인이 되시는 것이다.

 

(2)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의 시작으로서 승천으로 이어진다. 즉 부활 이후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셨던 사십일 동안의 기간은 승천에 대한 준비요 전환점이었으며, 그리스도는 본래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승천은 그리스도의 독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부활, 승천후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 중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곁에 계신다는 증언에서 일치한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가 이 땅에서 시작하셨던 그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행 1:1-3) 즉 이 사역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주체가 되신 것이다.(행 2:33)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행 2:33, 16:6, 롬 8:9)

 

예수께서는 그분의 지상사역 가운데서 삼직(왕, 제사장, 선지자)을 완성하시고 또한 그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서 이 세상을 친히 말씀으로 통치하심으로 모든 원수들은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사역의 계속으로서 지상사역을 행하시고 계신다. 즉 그의 몸인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지상사역이 성령을 통하여 지금 여기서 계속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Ⅳ. 오순절 성령강림의 성격과 교회시대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의는 크게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역사의 차원에서 단회적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적 차원에서 볼때는 오늘날 계속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1. 박형룡 박사의 견해

 

박형룡 박사는 성령의 세례를 신자의 영적 생활의 최초 체험과 동일시하고, 그 정화성, 최초성, 보편성을 강조했다. 성령 충만은 신자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을 얻고 영적 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는 성령의 비상한 은혜라고 하였으며, 성령의 평소적 충만(생활을 위한 충만)과 특별한 목적을 위한 특별한 경우의 경험들로서의 성령 충만(봉사를 위한 충만)을 구분했다.

 

2. 박윤선 박사의 견해

 

박윤선 박사는 사도시대와 교회시대로 구분하여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취급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성령이시니 지금도 놀라운 성격이 있는 초자연적 역사를 하신다. 이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단회성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계속성을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일, 곧 구속 사업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며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영적 방언으로 구별하였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시대의 이적은 병자들이 모두 치료되었으며, 재발하는 법도 없었으며, 몸이 당장에 완전해졌지만 교회시대에는 부분적 치료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도로 말미암는 초자연 역사를 부인하지 않으며, 교회시대에는 비록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지만 특별섭리가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방언은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에서 있으므로 방언하는 사람은 매우 조심하고 고린도전서 14장의 교훈을 염두에 두라고 권유한다. 박윤선 박사는 오늘의 방언을 초대교회의 방언과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시대에는 비록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지만 특별섭리가 있다고 말한다.

 

3. 이상근 박사(통합측)의 견해

 

이상근 박사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예언의 은사를 오늘의 설교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는 반드시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웨인 그루덤 박사는 구약 선지자와 동일한 예언과 그보다 좀 낮은 정도의 예언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개혁파 안에서 이미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오순절의 입장을 두둔하는 방향으로 발전된 것은 바람직한 결과가 아니다.

 

4. 성령세례 문제

 

오순절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 가운데 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세례 문제이다. 신약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이 7회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취하여 그 구절의 해석을 다른 구절에도 적용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조직신학에서의 성령세례라는 말과 성경의 어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사람의 응답하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은 사람의 응답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고백했다. 즉 신앙과 회개가 있기 전에 소명과 중생, 즉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있는 것이며 이것이 곧 성령세례인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사도들은 이미 믿는 사람들이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은 가룟유다를 제외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미 중생한 자임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즉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말한다.

 

요한 웨슬리는 시편 주석을 읽는 중에 마음에 변화가 왔다. 즉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이를 완전성화 혹은 회심(conversion)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직신학에서는 처음 예수를 영접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을 회심이라고 말한다. 웨슬리는 자기가 1738년에 회심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목사가 되기 전의 웨슬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훗날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가 초기에 했던 말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완전성화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이는 웨슬리가 이후로 죄를 안 짓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성화는 그리스도에게의 전적 헌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 너무 좋기 때문에 죄 지을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 장로교에서 새로운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기체험(crisis experience)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당시 영국 사회에 필요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웨슬리의 체험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웨슬리의 체험이 모든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수한 체험을 일반화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뒤집어 엎어서 쓰기도 하지만,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거짓 없는 믿음을 소유한 디모데도 사용하신다. 다만 웨슬리가 모든 것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 운동에서는 웨슬리의 체험에 있어서 은사의 체험을 강조한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형룡 박사는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 이후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공부했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는 방언도 끝났고 신유도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워필드의 주장을 따라서 은사가 끝났다고 이야기 했지만, 박윤선 박사는 한국교회를 돌아보면서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고 기도를 통해서 병이 낫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결국 박윤선 박사는 계시시대와 교회시대를 구분하여 성령의 역사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즉 동일한 성령이지만 역사에 있어서, 신유나 방언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진 사람들이다. 즉 제자들은 오순절을 통과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성령의 존재가 강조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세례 요한에게도 그렇고, 구약시대에도 이미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다만 제자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셨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구별해 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예수님도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그것을 그렇게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에 있어서 완전성화가 중요한가, 위기 체럼이 중요한가, 성결이 중요한가, 은사가 중요한가?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는 이때에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나의 것”으로 체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자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진리가 “나의 것”으로 체험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중생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각 사람에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신자는 인생의 순간마다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는 순간이 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의 체험,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체험은 평생 동안 계속 되는 것이다. 이 체험의 연속을 칼빈은 “죽고 사는 것”(Mortification and Vivification)이라고 한다. 바울로 말하자면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 그 순간에 우리 안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확정적 성화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을 아는 순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그 역사를 붙들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주체는 성령이시지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인격이시고 삼위 하나님과 함께 역사하신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강하게 나타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 방언을 정죄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영적 분별력은 필요한 것이다.

 

Ⅴ. 오순절 사건의 해석 : 구속역사적 관점과 구원순서의 관점

 

개혁주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구속역사적 관점을 강조해왔다. 오순절 사건을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여러 견해

 

1) Historla Salutis(구속역사)로 보는 견해

 

역사적 개혁교회, 특히 카이퍼, 워필드, 개핀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승천에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의 한 나뉠 수 없는 사건으로 취급한다. 이는 단회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2) Ordo Salutis(구원순서)로 보는 견해

 

오순절교회, 은사파 교회 특히 웨슬리, 피니, 르우벤 토리 등은 성령은사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이를 제2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구하여 받겠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 반면에 성령은사에 교회론적, 종말론적, 윤리적 측면의 강조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왔다.

 

3) 두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는 경우

 

개혁교회 안에서도 오순절 주의의 성령운동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회심 후 신자들의 체험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고신의 안영복 교수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의 구속역사적인 관점보다는, 구원순서의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을 조명하는 오순절주의의 입장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2. 단회성과 영속성의 문제

 

차영배 교수는 두 관점의 균형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그의 「성령론」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에서 하고 있다. 차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오순절 전이나 후에도 그 같은 모양으로 강림하신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단회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항상 보내신다는 의미에서 영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오순절에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에게 단회적으로 오셔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성령강림의 체험은 신자가 중생 후 한 번뿐만이 아닌, “영속적으로” 위로부터 강림하는 “동질의 성령”을 “각양 은사들과 더불어” 받아 누려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세례는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중생의 첫 단계, 곧 “복음으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감화로 거듭남으로써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과정”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며, 이는 신자의 존재 전체에 이르기까지 거듭나는 획기적인 역사로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평 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연속성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 개혁 교회 안에서 격렬한 찬반 양론이 있어 왔으며,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여 소강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영역과 현재의 체험적 영역이라는 두 측면에 대한 문제를 각각의 독특성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우리는 모든 신자가 새사람이며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의 몸은 멸해졌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새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로서, 그는 성령의 거소와 성전이 되어 성령의 새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리에 대하여 어떠한 양보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성령은 오늘도 위로부터 계속적으로 내려오신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2장 3절).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과다하게 제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바람직하기 못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할 것이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도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여러 은사들이 오늘날도 나타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강림의 역사는 사도행전 28장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세상 끝날까지 복음전파와 함께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현장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 또는 신 오순절주의의 틀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선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웨슬리안 또는 오순절주의의 구도를 도식하고 “제2의 축복” 체험을 일반화 하는 경향은 계시기록의 종결을 말하는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잘못된 주장인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기독교적 체험의 다양한 면을 인정해야만 한다. 웨슬리적인 체험도 있으며 디모데적인 체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며, 특히 체험에는 윤리적인 요소가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모두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삶(Coram Deo)이 지향하는 특징에는 윤리적인 면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격에는 감정적인 면이 있다. 따라서 너무 지적인 요소만을 강조하여 체험적인 요소, 정서적인 요소 등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험의 기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통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과 순서는 달라도 바울신학과 베드로의 신학이 다른 것은 아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에 있음을 깨닫고,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연합이 강조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교통이 강조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성령 안에서 성도의 체험을 평가한다면, 이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현상이기에 앞서서 영적 변화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 변화가 주어지는 성령의 체험이야말로 기독론적이요 교회론적이요 동시에 종말론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사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천상사역의 계속으로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오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들을 동반하는 비인격적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동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현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하여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냐를 계시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감격과 감사는 성도의 지상생활을 더욱 능력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즉 칼빈이 원했던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한 생활과 기도와 예정 속에서 그 기쁨이 더욱 배가(倍加)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성령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온전한 신자의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길성의 개혁주의 성령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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