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도신경의 의미와 역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Ⅲ.사도신경 본문 주해

A.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1. 개요

사도신경은 누구를 고백하는가? 사도신경은 우리가 곧 고백해야 할 아버지, 전능자, 하늘과 땅의 창조자의 세 규정들로써 고백의 대상을 구체화한다. 여기서 언급한 하나님은 사도신경의 전체에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

‘전능하신’이란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말로 ‘샤다이’의 번역이다.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곧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을 의미한다. 이 사랑이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해 주신 것이다. 결국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주권을 행사하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전능이란 말의 뜻은 “전적으로 능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의 범위에 대한 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모든 것의 범위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아름다운 것, 선한 것,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자연적인 것 등을 하시는 동시에 또한 더러운 것, 악한 것, 비합리적인 것까지도 하신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면 기독교 신관은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기도 하고 또한 감정에 따라 인간을 감정적으로 취급하신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본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당신의 성품에 반대되고 모순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또한 ‘가능’이라는 의미를 인간적인 사고의 체계에 묶어두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인 성품에 모순되지 않으면서, 그의 큰 뜻에 따라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시각으로 합리적인 일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때로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20세기 불투만과 같은 신학자는 사실에 대한 모든 문제들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확정되며, 모든 역사적 진술은 역사가들의 일상적 절차를 통해 입증될 때 비로소 수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실과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화적이라고 보는 부분을 부정하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면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삼차원적인 인간의 기준이하로 끌어내리는 불신앙된 모습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이적이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이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소부재, 무소부지, 무소불능이라고 표현한다. 무소부재란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고, 무소부지는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며, 마음속의 생각과 혀의 말까지 다 알고 계시는 그야말로 모르시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무소불능이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천지창조이다.

3. 우주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

창조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인 전제이다. 창조 신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증언을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형식적으로 창조라는 개념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창조라는 말은 지금도 창조를 해 가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뜻한다. 곧 만물을 신적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창조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다양한 현실의 현존재에로 부름 받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소극적인 의미의 창조는 자연과 역사 속에 있는 일체와 함께 그 각각의 요소들이 창조주와 불변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그 안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생물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일체의 것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전우주의 지배자이시다. 모든 인간의 생명의 주이고 역사를 지배한다. 그의 지배권은 교회와 믿는 자들의 삶의 영역을 넘어서 천체의 세계와 만물에 미친다. 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창조자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죽음과 무일 뿐이다. 사도신경은 바로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물의 창조자시며 보존자이심을 고백한다. 세계는 하나님 없이 존재하거나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피조물의 자유를 기뻐하시고 피조물을 돌보시면서 세계 안에 피조물과 함께 계신다.

4.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근원

이스라엘은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을 어떻게 알고서 믿었을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신앙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선택된 백성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창조주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5. 구별되는 피조물과 창조자 하나님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성경 첫머리에 고백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왔으므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강이나 산, 나무나 바위 등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은 창조신앙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선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을 신으로 삼고 섬기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을 거스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신앙고백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관계 안에서 번성한다. 그들은 깊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풍부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조화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인간은 창조자의 이 깊은 지혜와 섭리에 따라서 창조되고 보존되는 창조의 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피조물을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방식처럼 모든 生物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섬세한 관심과 생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연을 지나치게 이용하고 오용하고 착취만 거듭해 왔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의 죄악된 행동과 탐욕적인 착취로 중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었다.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만물, 인간을 기르고 먹이는 땅, 우리의 젖줄인 강물들은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 공기의 오염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져 가고 공장의 폐수와 세제 거품으로 물고기는 멸종되고 바다와 강은 악취를 풍긴다.

이리하여 인류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고, 자연환경이 죽어가므로 인간도 병들고 죽어간다. 이러한 위기에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들을 긍정하고 찬양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의 겉모양에 피상적으로 도취하는 태도일 수 없다. 이제 피조물들의 수난, 고통, 치명적인 병들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원인들을 근본적으로 규명하여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살아있는 신앙고백을 이루리라 생각한다.

7.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무소불능하신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리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고백이다(시편19:1-6, 139:7-10).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 즉 영적, 육체적, 정신적 필요를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B.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1. 개요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개에서 시작한다. 즉 그의 신분과, 출생, 죽으심, 장사지냄, 부활, 승천, 재림 등으로 세분적으로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측면에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주관적으로 구속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본 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 예수님의 신분과 속성 그리고 인간을 향한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2. 문자적인 의미

‘그 외아들’이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고, 외아들은 맏아들로 모든 유업을 이을 자로 하나님의 참 생명을 영원히 이을 자를 뜻한다. “우리 주”에서 ‘우리’라는 말은 세계 만민을 의미하며 ‘주(Lord)'는 모든 생명과 역사와 생사화복의 주관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님이 되신다는 이 고백은 단순한 교리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로, 지배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나를 지배하고 내 가정을 지배하는 이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의 인격, 재능, 소유, 재산, 자녀 등,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셋째로 명령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넷째로 생명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과연 이런 신앙으로 주님을 부르고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는 각자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예수’는 헬라어로 ‘구원’이란 뜻이며,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란 말로써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임금, 제사장, 선지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또한 ‘믿사오니’는‘믿습니다’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 중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에서 두 번째 고백에 해당하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역사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의 시금석인 동시에 기독교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도신경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상세히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랄 필요는 없다.

사도신경에서 성자 예수님에 대한 부분은 사도신경의 구도상 중심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대목이 두 개의 짧은 대목, 즉 아버지와 성령에 대한 대목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주장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믿음의 중심이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삼위일체나 구원, 부활, 영생에 대하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대속하심으로 이 모든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4.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1)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성령에 의한 잉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인간 예수님은 아버지를 갖지 않았다. 성령이 마리아를 상대한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의한 수태는 인간의 출생처럼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예수님의 출생은 하나님의 고유한 기선적인 행동에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보통 인간의 생물학적 생식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존재의 시작에 관여하신 것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말은 ‘예수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역사 안에 태어났지만, 인간의 생물학적인 영역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시간 안으로, 하늘로부터 이땅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예수님 잉태의 의미이다.

2) 마리아의 역할

사도신경은 아기 예수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동정녀 출산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것은 생물학적인 대상도 아니고 또한 영웅의 탄생신화와는 무관하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다. 동정녀 출산은 바로 이 본질적인 증거에 봉사할 뿐이다.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오실 자를 지시하듯이, 동정녀 출산의 교리도 말씀의 성육신, 예수님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창조 행위를 증거하는데 봉사한다.

3) 종합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설명으로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즉, 순전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음을 선포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출생과정과 전혀 어긋난다는 이론을 내세워 부정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를 알지 못하기에 아니 안다고 해도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를 알지못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무죄성까지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차지하고라도 우리를 구속하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죄가 없으신 분이어야 속죄제물로 가능하기에 예수님은 탄생부터 원죄를 가져서는 안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제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기에 인간의 측면에서보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자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원죄를 가진 상태로 대속제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지않으면 많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은 인간의 사고와 체계와 상상으로 납득가능한 부분만을 믿는다면 그 자체는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보편타당한 부분은 불신자들도 다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역을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완전히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야 했던 사실속에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느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그야말로 신비로운 방법으로 죄인을 향한 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실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야만 했던 그 이유는 죄인들의 모습과 적어도 인성적인 면에서는 같은 모습을 띠고 오시게 함으로 분명한 구속의 증거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만일 신비로운 방법으로 구속사를 전개하셨다면 아마 많은 그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자체를 부정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이요 은혜의 절정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다. 막연한 구속에 대한 감사가 아니고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탄생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되었다는 진술은 예수님의 생과 역사가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의 영원에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아담 이후로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향한 죄문제 해결을 위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차원을 포기하시고 인간세상의 3차원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1) 수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심판하여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일을 유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셨다. 이 고통이란 인간이 가하는 고통이요, 동시에 인간의 죄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배척이 주는 고통을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2) 화목제물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에 도달한다. 성육신을 기독교의 성소라고 한다면 이 대속은 기독교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최고의 기적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하늘의 기쁨과 축복에서 시작하여 갈보리의 고통과 수치로 내려가는 일련의 단계 중 첫단계에 불과하다(빌2:5-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된 이유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한 제물, 헌물과 보속물”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롬5:5-8 참조).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관용이나 인간의 호의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한 위대한 선언, 그러나 크게 오해받고 있는 선언의 의미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8-10).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 가지 면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죄에 대한 제사로 볼 때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다(롬3:25; 요일2:2, 4:10, 히2:17).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시야에서 도말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수단이 된다. 이 화목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화했던 창조주와 더불어 화목, 즉 평화를 누리게 된다(롬5:9-11).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가라앉힐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위하여 진노를 평화로 바꾸어 놓으신 구세주의 공로를 내세우는 일이다.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는 구속이 된다. 즉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속박과 불행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다(막10:45; 롬3:24; 엡1:7; 계5:9). 그리고 구속으로서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 죄 가운데 머물게 했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려 하는 모든 적대 세력들에 대한 승리이다(골2:13-15).

3) 종합적 의미

전 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고 성장과정은 소개되지 않고 바로 공사역에 해당하는 과정도 생략한 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시는 부분이 나온 것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고난을 받으신 부분이 중요하기에 성장과정이나 공사역 과정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끝내는 자기 몸을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탄생하셨고 죄의 흔적조차도 없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53장 5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성경 눅23:4에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줌으로써 메시야를 죽이는 역사의 장본인이 되었다. 그 후로 그의 이름은 계속적으로 거론되게 되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그의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알려지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려음에도 불구하고 민란이 발생할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주었던 그에게서 인간의 죄악된 모습, 한 치 앞도 못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사의 전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또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처럼 악역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본디오 빌라도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고 영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을 자초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공의를 실현하시고 반면에 죄인을 향한 용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섭리는 조금은 역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6.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1) 구원과 화해의 십자가

이 고백은 예수님이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시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차되는 만남이요,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용서의 팔을 내미신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랑과 용서의 팔이 십자가 위에서 못박힌 손이 되고 피흘린 몸이 되어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십자가에 매다시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우리 인간들, 죄와 사망가운데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과 미움이 한데 섞여져서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만이 널리 퍼지게 되는 온전한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

첫째는 죄없는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는 예수님을 따르던 신실한 제자나 신자들이 증거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던 당사자들이나 원수들이 증거한 것이다.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거했고(눅23:14-15, 요18:28, 19:4,6), 십자가에 함께 못박힌 강도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증거했으며, 빌라도의 아내가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주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27:19)라고 증거했다.

둘째로 매우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십자가는 극형의 죄수들을 사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으신 죽음이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고(롬6:23),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으니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죄값으로 죽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할 죄인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내신 방법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요, 엄숙히 성도들이 고백해야 하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인들을 구속하시려는 구속사의 절정이요 핵심이다. 한 마디로 죄없고 흠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용서함 받았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십자가는 주전 4, 5세기 전부터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틀로 사용하였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가장 중한 죄를 진 사람에게 지우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던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최고의 비천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순종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천년 전 십자가상에서 그 피흘림과 죽으심속에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두 가지 은총을 끊임없이 적용시키는 회개의 생활이 병행될 때 진정한 사도신경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온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이 되어서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대속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보혈의 은총 즉 한번 피뿌려 준비하신 사죄의 은총과 일곱번 피뿌려 영적할례은총 즉, 성결의 은총을 준비해 주신 그 은혜를 지금 순간순간 주관적으로 적용시켜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감사의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 십자가상에서 바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의 고난과 이 고난을 통해 준비해 주신 은총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는 시각이 짙다. 모두가 다 맞다고 본다. 하지만 성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고난을 무시하고 오직 영광만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십자가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 죄인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나아갈 수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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