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불교와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엄밀하게 말하면,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이 말하는 사생관은 삶과 죽음문제에 관한 종교철학적 사색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위에 엄존하는 생명을 살리려는 힘과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려는 힘과의 겨룸이 문제인 것이다. 죽음이 관심이 아니고 죽임의 문제이고, 삶 일반이 관심이 아니고 살림의 문제이 다. 사랑, 정의, 진실같은 근본 생명의 질을 중심으로 해서 매우 역동적인 살림과 죽임의 세력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 은 항상 죽이는 세력과 연관시켜서 이해한 것이고, 그러므로 죽음은 마지막엔 극복되고 정복되어야 할 세력으로서 초대 기독교들은 이해하였던 것이다. 죽음체험 이후의 생명의 지속 가능성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로스의 죽음 이후의 신비한 몸에 관한 이야기가 의미있게 들린다. 그 분이 "죽음 이후의 생이 존 재한다는 사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이다"라 고 말 할 만큼, 의사로서 또 학자로서 강조하고 있다. 그 분의 그런 신념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삶과 죽음 이후의 신념에 관한 내용과 내적으로 많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목회서신 속에 다음과 같은 그의 신념이 피 력되어 있는 점과 몹시 통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 후서 5:1-3)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 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름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몸을 입은 것 같이, 또 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상을 입을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40,4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후 생명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히브리적 전통에 선 바울과 헬라적 전통에 선 후자의 영생신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 본성속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불사체로서 영혼이, 순수 정신적 실체로서 영원하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 아니 하고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신념에서는, 인간존재를 순수히 사멸하는 흙덩이 곧 장막적 존재라고 보는 것이고, 속 사람이 영생하거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 것은 인간자기자신 속에 있는 스스로 자존하는 불사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덧입혀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순수 정신적 실체의 불멸성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몸"을 갖추는 불멸신앙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물론 이 땅 위에서 가지고 살던 혈과 육으로 구성된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몸이 그대로 지속하는것은 아니라고 단언 한다.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니, 요사이 표현으로 하면 그 생명체의 존재방식과 구성원리와 구성체의 소재가 다르다는 말이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나 사도바울이나, "영혼이 불멸한다"는 명제적 신념은 동일하지만, 그 불명성의 근거와 "몸"에 대한 신념이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인간 영혼자체가 지닌 불멸적 속성 때문에 불사하여 영존한다는 철학적 신념이지만, 바울은 모든 생명의 근원자이시며 지탱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영적 생명체를 선물처럼 벌거벗는 무와 같은 인간영혼에 덧입혀주시기 때문에 불멸적 영생의 생명을 지속 한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신앙이다.

위에서 말한 사도 바울의 사후에 덧입혀지는 새로운 선물로서의 "영적 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은 엘리지베스 로스박사가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가 수많은 임사체험자들을 상담하고 난 후 연구결과 말한 내용과 몹시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 위에서 장님이었던 사람이나,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나, 어떤 형태이든지 지체불완전한 사람도, 사후 생명체 경험을 한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온전한 몸"을 구비한 자기생명체를 보았다고 했다. 순전히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로스 박사의 이러한 임상증언이 지체불구자들의 무의식적인 자기소망의 투영이거나 사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 은 사후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신념은 단순한 희망적인 심리의 투영이거나, 개인의 육체성에 관한 집념에서 해탈 하지못한 중생들의 카르마 결과가 아니다.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로스 박사는 그것은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지식의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후 생명현상과 죽음이해의 패러다임이 다른 이유

한국인으로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적 종교의 위대성을 늘 느끼면서도,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 생명에 관한 너무나 대조적인 두가지 패러다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학문적 관심이 된다. 자연과학자들에게 있어서 "빛의 본질"을 밝혀보려는 과학적 실험방법과 실험도구에 따라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그것을 "빛의 이중성" 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처럼 "궁 극적 실재", "삶과 죽음", "영혼"등을 이해 할 때도, 기독교는 입자형태의 패러다임으로서 그것을 이해하려하는 유형적 종교라면, 불교는 파동형이라고 설명해 볼 수 있는것이다

.입자형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주체적 인격간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파동형은 빛이 온누리에 파동치는 원융회통성이 강조 된다. 그것이 기독교를 지나치게 인격적종교, 영혼의 불사성에 집차하는 듯한 종교로서 오해하기도 하고, 불교는 비인격적 공(空)이나 무(無)의 종교로 일방적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빛이라는 실재 안에 입자성과 파동성이 함께 존재하듯이 깊이 신앙체험의 단계로 들어가보면 기독교 안에도 파동성 이 있는것이고, 불교 안에도 입자성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방식에 의하면, "몸"의 개념은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리적이 통일체로서 나타나는 생명의 총체성에 대한 이름이다. 사람은 몸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의 생명체이 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몸의 개념을 중요시 한다. 몸에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기능과 영광이 다른 다양한 몸의 존재방식이 있을수있다고 보는 것이 바울의 견해였다. 말하자면 천사들도 몸이 있는 것이고, 사후의 망자도 단순한 정신적 존재가 아니 라 "신비한 몸"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전생에 내가 만든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다양한 인과적 영향이라고 이해하는 "업보사상"을 갖지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총체적 책임체로서 "몸의 부활신앙"을 갖는 것이다. 바울의 해설에 의존하지만, 사후의 신령한 "몸을 덧입각자의 생을 마감 할 때, 덧입는 "영적 몸"으로 서의 영혼의 불사체이고, 또다른 하나는 만물의 종말적인 일"에 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가지 견해가 혼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된다고 봐야하겠다. 여하튼 죽음이후에 덧입는 새로운 몸, 새로운 생명의 형태변화에 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단계의 결정적 계기가 있다고 말하는 셈 이 된다. 한번은 완성의 날에 만유가 하나님의 영광안에서 변화하고 온전한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이다. 기독교에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자연의 질서로 보지않고 극복되어야 할 것, 심지어 "마지막 원수"라고 까지 본것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불의한 죽음의 세력이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독소와 죄의 권세" 때문인 것입니다.

사후 빛의 체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로스박사가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렇게 증언하고, 수많은 죽음체험을 하고서 깨어난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적 경험은 환한 빛을 경험했다는 증언이 있다. 죽음 직후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나 염라대왕 앞에 끌려나 간다는 한국 민담의 부정적 이야기 보다 우선 밝아서 좋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사후의 빛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표상화 할수 없도록 금지되어있는데, 오직 하나님의 실재를 "빛 의 근원, 또는 "존 재와 생명의 빛 그 자체"로서 상징하고 또 빛체험을 하는곳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후의 영혼이 환한 빛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 자기 생명의 근원자와 대면하는 경험, 다시 은총의 빛에 감싸이고 용납 된다는 경험, 자신의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노출된다는 경험이나 신념을 상징하고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절대자 하나님과 천상의 신령한 존재의 현현경험엔 항상 빛이 동반된다.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험이랄지,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경험한 것등이 그 예이 다. 하나님은 빛으로 상징된다.(요한일서 1:5, 계시록 22:5) 로스의 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한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들은 "제 눈에 제 안경"이라고 하는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붓대롱을 통하여 하늘을 보지만, 다른 사람이 쓴 색 안경도 있을 수있고, 다른 사람의 붓대롱도 있으니까, 내가 본 하늘이 전부라는 독단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작은 하늘도 분명히 하늘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람의 모든 인식과 관념과 사상은 그가 몸담고 자라난 문화, 역사, 전통, 언어, 지질기후풍토에서 형성된 '마음의 스크린'을 통하여 경험된다는 일종의해 석학적 깨달음이 중요한 인간성숙도의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기독교는 죽음의 이해를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으로서 이해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죽음을 생물학적 한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인간생명의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원창조 질서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의 빛 앞에서 볼 때 극복되어야 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 둘째,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안에서 볼 때, 단순히 생물학적-정신적 한 개체가 종말에 이르고 해체되 는 중성적 과정이 아니고 하나의 엄연한 생명에 대한 횡포, 가차없는 지배권세, 공격적인 세력, 죽임의 독화살, 쏘는 가시로 서 파악되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는 인식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분리하는 그런 자연적인 분리현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인간의 영혼(soul)은 육체 (body)와 통일체를 이루어 살아있는 생령으로서의 몸(SOMA) 을 이루며,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여 숨을 거둘때, 그 육체는 자연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잠정적으로 남아 어떤 사후의 생명적 경험을 한다고 보지만, 그 영혼이 플라톤의 철학에서처럼 본래부터 천상에 있었던 신적존재이거나 전생(前生)을 지닌 윤회하는 영혼이라고 보지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이 잠정적으로나마 보존하시고 변화시키시고 궁극적으 로는 영적몸을 덧입도록 하지 않으면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 그림자같이 덧없고 힘이 없는것, 잠정적인 정신적 실재라고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의 속생명은 혼백(魂魄)일 뿐인데,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혼(魂)은 영혼(靈魂) 으로서 속성을 지니며 하나님 앞에 존재하고 영혼으로서 기능 한다.

기독교 복음을 증언하고 있는 신약성경 자체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지평융합하는 삶의 토양 속에서 증언, 전승, 편집 되었기 때문에 죽음이후 인간생명의 상태에 대한 언설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예를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사에서 처럼 죽은자는 잠들었다가 마지막 종말의 날에 깨어날 것이 라고 믿는 마리아의 고백(요11:1-24)이 있는가하면, 죽음이후 에 곧바로 낙원에 들어간다는 신앙도 있다(눅23:42-43).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도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의 영향으로서 임박한 종말의 날에 죽은자의 홀연한 부활신앙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후 주와 함께 있을 것을 믿는 천국신앙이 있다.(고전 15:31,살 전 4:14-18, 고후5:1-2,12:2-4)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생관에 관한 기독교신앙의 기본적 입장은, 하나님만이 영원 자존하시는 창조주이시요 영존 하시는 전능자이시며, 그 피조물에게 긍휼과 지비를 베푸시고 피조물중 특히 그의 형상을 닮아 지음받은 인간을 당신의 영원 한 영광과 생명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영원한 불멸성과 영원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고, 영원하신 자존자의 선물이며 초청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이 지닌 가장 깊은것,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것마져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땅에 속하고 혈과 육에 속 한 것이지 그것 그대로 영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 이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속 생명의 질적변화와 영적생명으로서의 형태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않된다고 본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피조물의 한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피조된 것이기에, 영원은 시공간적 삶의 연장이거나 무시간적 영원이 아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고 모든 피조적 시간의 창조적 모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이 지배적이었던 1세기에 신약성경이 완결되었고, 종말과 만물의 성취, 그리고 죽은자의 부활이 임박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후 생명에 관한 섬세한 가르침이나, 종말이전의 죽은자의 중간상태에 관한 자세한 목회적 서신이나 교육지침을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은 사후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나아가 그의 땅위에서의 언행 과 믿음의 유뮤에 따라 영생과 영원한 죽음을 판가름해야하는 단순하고도 단조로운 사후생명에 관한 패러다임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교부시대 이레네우스 교부의 만유회복구원론 (Recapitulation Theory)이 좀더 발전하지 못하고, 중세 로마카 토릭의 연옥설 교리로 굳어져 버리게 된것이 아쉽다. 그래도 기독교 교파중에서 죽은자를 위한 어떤 구체적 목회신학적 의 례를 베푸는 교회는 카톨릭교회 뿐이다. 개신교에는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에 관한 신학적 이론과 예배학적 의식이 매우 덜 발달된 종파이다. 여기에 개신교신학의 영성위기가 있다.

죽음이라는 엄숙한 현상을 사실그대로 받아드리는 자세가 우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너무나 자명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때, 죽음의 심각성도 사라지고 삶의 진지성도 약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죽음이 모든 인생의 마지막이고 끝이라고, 그 이후엔 개인적 생명으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해도 삶의 진지성과 신비로움이 손상 당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는 그것을 '역설'이라 고 부르는데,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는 죽음을 먼저 진지하게 받아드릴 것을 요청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부활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기독교의 이해 

칼 바르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고린도전서 전체의 근본주 제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과 초대 그리스도교 케류그마의 핵심적 멧시지라고 보았다. 그리고 15장에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어휘들, 예들면, "죽은자의 부활", "영적 몸" ,"육체적 부활" , "변화된다","하늘에 속한자의 영광"등등이 기독교의 본 질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어휘임을 말하고 고린도전서 15장의 바른 이해야 말로 기독교가 헬라철학의 영혼불멸설, 영육이원론, 정신적 영적 영생론, 윤회 환생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 주는 기독교의 근본멧시지라고 보았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 증언하려는 복음의 근본 메시지는 인간이 지니는 불멸성에 대한 종교적 희구나, 철학적 변증이 아니다. 여기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역사와 존재세계의 영속성이나 불멸성이나 신성성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다스림과 영광의 성취를 말하려는 엄숙한 그러나 기쁜 증언이다. 기독교가 말하려는 영원한 생명은 어떤 형태에서 말하든지 단순한 이 생의 연장으로서의 영생이 아니다.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복음의 세계와 이 세상의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세계가 충돌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아름답게, 자연스런운 현상으로 볼수 없다. "죽음의 횡포"와 "죽음의 쏘는 가시"와 "죽음의 파괴적 힘 과 그 추함과 죽음의 세력"을 바로보고, 극복되어야 할 마지막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엄숙한 사실과 죽음 그 자체의 횡포와 협박이 얼마나 무겁고 절망적인 것인 가를 똑바로 진지하게 인식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이 세상과 자연적 생명의 영생과 진리를 밝히는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행하신 놀라운 개입과 일으키신 사건과 약속과 승리를 증언한다. 죽은자의 부활에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고 행동을 취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 이시지 인간이나 자연이나 존재 그 자체나 막연한 무한자가 아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분, 주 하나님 이시다.바울은 부활생명의 이해를 위한 유비로서 씨앗이 죽고 새로 운 형태와 속성을 입으면서 씨앗으로부터 나오는 식물의 출현속에서 불연속적인 연속성, 임계 점을 거치면서 전혀다른 존재를 덧입는 생명의 형태변화를 본다. 물론 부활생명은 식물의 씨앗이 죽고 그 속에서 새 싹이 터 나오는 것과 같은 "존재의 유비"로서 설명 될 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할 수없이 사용하는 유비요, 비유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 유비가 말하려는 촛점은 변화, 불연속적인 연속성, 새로운 몸의 덧입음, 새로운 속성의 출현과 존재의 다양성과 각각에 걸맞는 영광의 질적차이 등이다. 바울은 말한다: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않을것 으로 다시 살며, 욕된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 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 44)칼 바르트는 부활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를 입을 때, 비육체적인 신령한 정신적 실체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가 믿는 부활생명은 땅 위에서 몸안에 살던 영혼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영혼의 그자리에 하나님의 영(pneuma)이 직접 임재함으로서 "영적인 몸"(soma pneumatikon)으로 질적변화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유한한 생명의 榮 化"가 이루어 지는것을 말한다.

"영적 인 몸"은 처음 아담이 창조받았던 생기에 의해 만들어 진 흙으로 된 몸이 아니다.그것은 변화받은 몸이고 새롭게 덧입은 몸이다. 그것이 기독교 가 마지막으로 대망하는 종말적 영생이다.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기다리는 영혼들도 아직 이 영적 몸으로 부활의 몸을 덧입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만물과 산자와 죽은자들은 십자가에서 상처받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 몸이 덧입었던 "영적인 몸" 곧 처음열매로서 나타난 부활의 그 영적 몸을 덧입기를 기다리며 아직도 시간 안에서 신음하는 나그네 삶 속 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벌써 그 부활생명의 빛 안에서 생동하는 생명의 빛 과 능력을 맛보며 성령의 위로와 약속 안에서 산다. 그 희망은 막연한 약속이나 근거없는 소망 이 아니라, 이미 처음익은 열매를 맛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 생명 안에 감추 인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챤 신앙의 본질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도 모두 '은총의 선물'로 보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하려는 인생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살게된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생명을 감싸고 있는 두 괄호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괄호이지만, 하나님은 그 괄호를 또 감싸고 있는 더 근원적 괄호이고 존재와 생명의 본래적 가슴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는 것이다.그러므로 기독자는 자기 생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귀중한 생을 알차게 영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기실현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4] 에필로그 

불교가 불생불멸하는 속성을 지닌 진여자성(眞如自性)을 회복함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구원 패러다임이라면, 기독교는 생명의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주(主)하나님 신앙 위에 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켜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첫열매 위에 굳게 선 "영적 몸을 덧입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다. 불교와 기독교 그 두 종교의 영생관은 같지 않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적인 마음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곧 그대로 불생불멸 하는 것이며,그 회복은 종말의 날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나 깨달음을 통해 곧바로 회복한다.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의 지성소의 속 사람 영혼은, 그것 자체가 불생불멸하는 영원자가 아니고 궁극이전의 신령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영 에 의하여 변화받고 영적인 몸을 덧입어야 할 것으로 파악 된다. 죽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극복되어야 할 인간존재의 규정성이라고 파악하는 점은 불교와 통하지만, 불교와는 다르 게 죽음이 갖는 독소와 쏘는가시 곧 죽음이 휘두르는 죄의 권세를 감지한다. 죽음은 없는것이 아니고 극복되어야 할 심각한 원수로서 파악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무시할 수 없는 두 종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이제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게된 불교신 자와,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지금 성령의 은총 안에서 맛보며 중생 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펼쳐내는 삶의 열매와 삶의 행태는 놀랍도록 서로 통한다는 점이다.그 통하는 모습은 자유한 모습, 생사를 초월한 모습, 감사하고 봉사하는 삶, 삶의 현실성을 더욱 뚜렷이 느끼고 성실하게 사는것,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삶등으로 나타난다.

왜 종교의 유형적 특성은 그렇게도 다른데, 위대한 세계적 보편종교에 귀의하는 참 신앙인의 삶의 구체적 열매는 그렇게 닮고 서로 통하는지 나는 알지 못 한다. 다만 하나 아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은 역사적 종교로서의 불교나 기독교보다 더 크시 고, 그 양 진리를 모두 포함하시는분이며, 빛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나타내면서도 하나의 빛이듯 이 , 진리 그 자체이신 "궁극적실재"(Ultimate Reality)는 불교적 표현으로서 법성이나 진여자성으로서 이해되기도 하고, 새로움을 창조해가시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삼위일체 주 (主) 하나님으로서 이해되기도 하는분, 곧 모든 역사적 종교와 신학과 경전을 넘어서시는 신비자 라고 밖에 달리는 이해 할수 없다.

세계관적으로 말하더라도, 기계론적이고, 유뮬론적인 사고가 지난 300년간 풍미해왔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관 인생관이 이제 어느정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세계와 생명현실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 보려는 발상법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신과 물질과 영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열린 마음, 그리고 그런 새로운 사상에 대한 철학, 물리화학, 의학, 심리학,종교학,신학등 다양한 학문간의 학제간 교류와 공동연구등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생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현세적 삶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책임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긍정적으로 보며, 생과 사를 동시에 포괄하는 더욱 넓은 의미 에서의 참다운 큰 삶을 회복하려는 성숙한 현대인들의 자기성찰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죽음을 외형적인 면에서 보면 유한생명의 끝이지만, 내면적인 면에서 보면 자기 생명의 옹근 열매가 알곡으로 영글어 껍질을 깨트리고 나오는 것이고, 알로 말하면 알을깨치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과정이다. 문제는 각자 자기생명의 속알이 진실과 사랑과 자비와 어짐으로 옹근열매로 익어가는가의 여부이다. 

 

장지(葬地)문제나 상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죽음이후까지 이세상의 권세와 부를 연장해가지고 갈 수있기라도 하는양 착 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 딱한 사람들이다. 이 땅 위에서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이웃을 외면하고 살다가, 죽음에 임하여 억울하게 그모든 소유를 두고가는 것이 아까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보다는 소박하게 살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고 위대하게 살고가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기의 죽음뒤 시신을 화장시키지 못하게하고, 평소빚지고 살았던 산속의 생물들에게 먹이가 되도록 공양하는 선승(禪僧)들의 초연한 자세, 의학 발전을 위해 해부학자료로 시신을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들, 장기이식자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여 수많은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시신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기념관 속에서 항구보존하려는 작태는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 날 뿐아니라, 매우 역겹고 추해보인다.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어려운 종교나 철학적 논리를 운위하는 것보다 삶의 실천을 통하여,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여 두려 움없이 죽음을 넘어서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 그들이 귀의하는 종교가 다를 수있고,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신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의 삶과 생명은 죽음으로 다 끝 나는것이 아니며,죽음을 능히 극복하고도 남는 죽음보다도 더 강한 능력이 이 우주에는 존재한다는 것, 그 힘은 어쩌면 진리, 사랑,자비, 어짐, 진실, 정의, 우정등이라고 이름부를 수 있 을 것이다. 

 

[1] 참고한 도서및 논문01. E. 퀴블러 로스, 최준식 역, on Life After Death,死後生(대 화출판사,1996) 

02. 김승혜외,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 1990) 

03. 칼 바르트, 전경연역, 죽은자의 부활: 고린도 전서 15장 강해 (복음주의신학총서 22) 

04. 파드마삼바바, 유시화 역,The Tibetan Book of the Dead 티벳 死者의 書( 정신세계사,1995) 

05. Fransis Story저, 김완균 역, Rebirth, 환생(장경각,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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