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 어려운가?
2009-10-13 09:45:29 이름 : 이근호
성경이 어려운가?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실천하기가 어려운가? 한 예를 들어보면, 주기도문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일단 어렵다는 쪽의 견해를 들어본다.
1. 어렵다는 견해
사람들의 상식에는 일용할 양식은 본인의 노동 여하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바탕은, 본인이 얼마나 노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경에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로 말라”(살후 3:10)고 되어 있다. 이는 일용할 양식을 얻어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은 성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 쪽에서 결정한다는데 있다. 즉 ‘내가 하고 싶은 살면 돈이 들어온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제시하는 돈 버는 조건에 부합될 경우에만 돈이 들어온다’이다. 예술 한답시고, 전업 화가, 전업 시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면 거의 백수가 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돈 버는 조건’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서 들어선 길이 바로 예술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예술가라도 어느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난도 같이 듣기 마련이다.
이로서 이 세상에서 돈을 벌어서 일용할 양식을 취득하려면 세상에 부합되는 인간상으로 다듬어져야 하고 늘 조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돈 버는 지장되고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하나 둘씩 삭제시켜 나갈 때만 돈이 들어온다.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열심히 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돈이 안 들어오면 일용할 양식도 뭐도 없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기댈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하여 연구해서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야 기도하는 것도 효험이 있을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되고 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하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말씀 가까이’ 생활태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돈 버는 요건’에 해당되지를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 즉 세상에서 수상하게 보게 된다. 맡은 업무에는 충실하지 않고 개인적인 종교 활동에 광신도처럼 빠져있다는 오해를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 세상은 결코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면 돈 줄게’가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따로 폐쇄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어서 같은 의식이 있는 자들끼리만 따로 모여, 모든 사유재산과 가정까지 이 집단의 유지를 위헌 다 던져 넣어야 한다. 그래서 자립적인 생존 방법을 따로 구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일반 세상 속의 사람으로 살려면 신앙이 있어도 없는 듯이 해야 한다. 쉬는 날이면 무조건 직장 선배가 요구하는 대로 친목을 도모하는 일에 참석을 해야 한다. 거기서 직장해서 돌아가는 일의 성격과 정보와 흐름을 익힌다. 일의 흐름을 파악해놓아야 직장 일에 손발이 맞는다. 직장인이란 마치 부속품 하나하나와 같아서 자신이 맡은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 타인들에게는 각자 딸린 식솔들이 집에서 살림한다.
따라서 직장업무에 서툴면 결국은 주위 동료들의 가족들까지 마음에 상처를 주고 생계까지 위협하게 된다. 돈이 되는 일을 따내면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직장인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 통일교든, 여호와 증인이든, 불교신자든, 무교자들, 기독교교인이 되었던 그런 것은 따지지도 묻지도 말아야 한다. 업무의 달인이 되는 것이 최고다. 중요한 것은 따 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해서 주문자나 소비자를 만족시킬 때, 그 다음 생계를 위해 주문을 받을 수 있는 신용도가 증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주위에서 “너 필요 없어”라고 내칠 때까지…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면 일용할 양식이고 뭐고 없는 판에,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보고 달라고 기도하라니 참으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2. 쉽다는 견해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위 모든 상황이 나에게 돈이 들어오게 하는 일들로 배당이 되고 배치되고 할당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뜻한다. 만약에 이런 기도에 소홀이 하면 주변 일들이 꼬여서 나에게 돈이 들어오기는커녕 현재 있는 돈까지 마저 빠져나가는 수가 생긴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께서만 나에게 ‘생존의 조건’을 지켜줄 수 있다는 신앙이 없기에 교만스러운 생활을 한 참혹한 결과다. 즉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교만이 자신의 생계까지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따라서 “오늘도 좋은 일(=돈이 생기는 일)만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으로 뭐가 어려운가? 세상만사가 하나님 손에 달렸음을 믿는다면, 그 앞에서 겸손히 살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 정도는 얼마든지 제공해주신다.
3. 불가능하다는 견해
‘불가능하다’는 말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주체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신앙생활의 주체가 인간이라면, 인간은 뭐든지 자기 쪽으로 사유화시키고 소유화시키고 끌어당겨 ‘나만의 것’으로 전환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그 자신을 잊지도 못할뿐더러(고후 12:2)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엡 2:9/롬 9:320)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롬 10:2) 자기를 미워하지를 못하고(요 12:25) 자기 영광을 고려하게 되고(요 12:43) 결국 섬김의 대상이 되고(롬 16:18) 자기 부인이 안 되니(마 16:24) 결국 십자가의 원수(빌 3:18)가 되어 살게 된다.
이들은 자기 소유의 신앙이 따로 있어 자기만이 즐길 수 있는 요건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즉 신앙이 있어야 그 신앙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풍성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을 외치는 자들의 주장이다. 쉽게 ‘내 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즐겁고 행복한데 하나님이 ‘내 것’으로 주시겠다는 것까지 마다해서 신앙생활을 핍폐스럽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앙의 용도가 자기만의 것이 생겼음으로 인해 자족하는 삶이라고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마가복음 16:14-15에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되어 있다.
즉 신앙의 용도는 오로지 ‘나만의 소유’로 전환된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예수님의 행하심과 누구심을 증거하는데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도의 신앙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만의 것’과 ‘예수님의 소유된 것’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십자가의 능력이 ‘나만의 것’을 고집하는 이 정과 욕심을 늘 못 박게 되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가동된다.(갈 5:24-25)
성도는 이로서 십자가 복음의 자체적인 능력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게 된다. 복음 전파와 무관련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규정될 수가 없고, 성도의 신앙 없이 성도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도 없다. 이로서 성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소유로서 살아가게 된다.(고전 6:18-20/3:23)
즉 “어떻게 하면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가 아니라 “왜 저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까?”가 관권이다. 이렇게 되면 ‘일용할 양식’이란 말씀, 즉 복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된다. 즉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비로소 살 수 있는 것이다. 떡을 얻기 위해 떡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떡이 주어질 때, 그 떡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말씀이 된다.
돈도 이와 마찬가지다. 돈을 얻기 위해 돈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돈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위해 쓰는 돈도 복음을 위해 쓰이는 돈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가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나만의 것’으로 고정되고 싶어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이생의 자랑거리가 들 끊고 있다. 인간은 매일 화산 위에 거주한다. 왜냐하면 그 정과 욕심은 지옥의 불이 되어 내부에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위력으로 복음 증거로 돌린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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