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기억하며

죽은 자를 기억하며

죽은 자가 산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풍습은 세계 어디에나 있습니다. 제사, 추도예배, 몇 일 장(葬) 등의 이름으로 자녀들이나 친인척들을 자신이 죽은 날에 부릅니다. 이 때 산 사람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게 됩니다. 나의 부모 혹은 자녀, 남편, 아내 였던, 너무도 소중했던 사람.......그래서 죽어 없어져버리면 나도 못살것 같았던 그 사람.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날, 우리는 여전히 잘 먹고, 잘 자면서 너무나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지금껏 버티면서 살아있는 내가 모질게도 느껴지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도 새롭게 새겨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나의 소중한 사람의 죽음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엔 나도 죽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옅은 죽음의 연장선 위에 잠시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우리가 추억하고 있는 그 죽은 자가 잘 보여주듯이 흙인 것입니다. 흙 같은 인생, 즉 죽음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아이를 낳아도 생명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낳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음의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쉬지않고 예외없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예술과 문학에서 다루어져 온 영혼의 상처와 정열이라는 것은 모두 이 죽음으로부터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속여볼려는 욕망,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의 반작용으로 인간을 죄의 종으로서 더욱 충성되게 만드는 힘의 근원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 본질은 흙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자신이 아무리 부자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어도 그 본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어느 시대의 왕보다 많은 것을 누렸지만 인생을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실토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유물과 행위로써 만족할 수 없는 '이미 죽은 자'인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인물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는지 개가 와서 자신의 상처를 핥아도 그냥 내버려둘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흙인지라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와 있었습니다. 사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거지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저주했던 그 곳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물과 자신의 업적이 자신의 본질을 바꾸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게 하신 '어떤 한 분 안'에 놓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가 건설한 천국이 아니라 다시 말해 내가 주인공되는 환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천국되신 어떤 분의 죽음 안에 덩그러니 놓여진 자가 바로 천국백성인 것입니다. 이미 천국 자체로서 오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소개하셨다는 것은 기존에 잘 살아보겠다며 아둥바둥 버티고 있던 이 땅의 인생들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고, 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이요 생명일 수 없음을 그 분께서 계속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직 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만 비치(備置)되어있다는 것을 날마다 고백시키고 계십니다. 그 고백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고난 앞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먹고산다'는 기존의 철학을 여전히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심한 중병에 걸려 아픈 데도 감사하다며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도망당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참고 인내하면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리라'는 노림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밀려와 나를 덮치면, 죽기 싫다는 본성을 발악하듯이 솔직하게 내뱉어야 합니다. 나를 이렇게 심하게 처우하시는 하나님이 원수같이 싫어야 정상입니다. 지금 내 앞에 예수가 서 계시다면, 당장이라도 십자가로 끌고가서 못 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로 각자 자기가 행한 대로 먹고 마시면 속 편하다고 정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버텨볼려고 합니다. 인내할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를 마일리지처럼 쌓아두고 나중을 기약할려고 합니다. 그 나중이 무엇입니까? 나 잘되는, 나 알아주는 해피엔딩 아닙니까.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함없습니다. 이미 죽은 흙이라는 본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자체에서 탈출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시는데, 인간은 애굽에서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내 등을 떠밀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버티면서 어떻게든 애굽에 남아서 더 많은 애굽의 것을 가져볼려고 갖가지 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쇼를 간파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히든카드는 이미 노출되어 있습니다. 결코 자아를 부인할 수 없고, 나를 위해서라면 신(우상)도 창조해내는 그 무한한 자기종속성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언약대로 인간들에게 영광을 취하시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기에.......


십자가는 이렇듯 우리의 본질이 어떠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건에 포섭된 자들은 자신의 본질을 더 이상 속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잘 가꾸거나 개발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남의 소유와 자신의 것을 비교하거나 그 결과에 흐뭇해 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거칠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을 얽매이게 할 것이 없습니다. 왜요? 이미 자신의 본질을 알아 버렸으니까요! 이미 죽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이며 부활이신 분 안에 들어와 있게 되었으니까요!


죽음과 정면충돌하면서,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그 살과 피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 공급해주고 계신 주인에게 내 속내를 벌렁 뒤집어 깐 것처럼 들킨 종의 자유함을 누가 뺏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다운 분에게 종의 마음을 들키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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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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