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삶의 연결선-김대식 성도님의 글

십자가와 삶의 연결선-김대식 성도님의 글

종착역에서의 만남


2009/08/12 00:57 in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종지부 찍은 십자가 종착역



오늘 또 하루가 지나간다. 시간이다.
그러나 사건을 품은 시간은 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씁쓸하다.
그리고 지친다.


복음은 참 쉽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쉽게 지친다. 피곤하다.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얼마전의 공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참으로 부럽다고.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하늘에 천군천사들이 춤추며 반기는 탕자 하나 돌아오는
죄인 하나 돌아오는 그 아버지의 감격스러운 마음


아버지는 참 쉬웠다. 자신이 흘린 피가 드디어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탕자를 보며 죄인 하나 돌아오는 것이 하늘의 영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맏아들은 뭐가 그리 복잡한지 턱 하니 숨이 막힌다.
그리고 지친다. 피곤하다.


맏아들은 하나 하나 따지기 시작한다.


저 금가락지 왜 나에게는 왜 안주는가? 신발도 신겨 준다.
가장 제일 좋은옷? 살진 송아지 한마리도 잡아준적 없다.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금가락지는 죄인 된 자에게만 주는 용서의 증표이다.
정 용서 받고 싶다면 탕자처럼 되면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탕자가 때려죽어도 되기 싫은 것이다.
저런 벌거벗은 놈 보다는 단 한번도 탕자 된 적이 없는 자신의 깨끗한 신체(거룩한 옷)가  훨씬 낫다고 여긴다. 선과 악의 판단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발가벗겨지고 맏아들 말마따나 창기와 합한 몸이였고 더러운 옷 냄새나는 신체를 가리우고자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준다.


아버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신이 거룩하기에 아무리 더러운 자식이어도 더러움 자체가 묻지 않는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탕자가 되어보라? 그런데 맏아들은 그것이 못 믿겨워서 아버지와 분리된 자신만의 거룩한 옷 거룩한 신체를 따로 국밥 처럼 준비해 왔고 드디어 그 몸을 사수하는 진면목을 저 더러운 탕자의 몸과 차별화 하면서 증거한다. (그 따위 어리석은 불공평의 옷을 입을 빠에 차라리 자신이 지은 옷을 입겠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불공평의 옷 거부)


그러면서도 자신의 거룩한 옷 보다 더 나은 옷 더 좋은 옷이 탕자(창기와 합한 더러운 신체)에 아버지의 용서로 입혀 지니 배 아프다. 졸지에 타인이 되어버렸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더 나은 제사는 이런 방식이다. 선악이 덮치고 죄의 소원이 덮치니
탕자 되어보면 알 건데 때려죽어도 탕자는 되기 싫고
탕자(죄인)를 거부하는 창기와 합한적 없는 깨끗한 자신의 신체(의인)은 고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남의 옷이 더 이뻐 보인다.

항상 그 의인된 깨끗한 자신의 신체 보다,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옷이
탕자에게만 덮혀진다. 아무리 봐도 더 낫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뭐뭐 보다 뭐뭐가 더 낫다.
이것이 지혜이다.
지혜란 뭐뭐 보다 뭐뭐가 낫다는 식으로
기존의 틀에서는 이것이 옳게 보였는데 알고보니 저것이 더 낫다는 식으로
반전과 역전과 교체가 일어나는 식이다.
(지혜 곧 아름다움이란 자기소유가 되면 고정화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 두면 너무 너무 아름답게 뛰어논다. 왜 그 아름다운 꽃을 꺽고 싶은 것일까? 마치 선악을 왜 꼭 따먹어야만 하나?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악을 마음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고. 기여이 나도 선악을 알아서 선악의 판단자인 하나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제대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증거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래서 지혜란 사랑처럼 움직이는 동적인 것이다.
고정화 된 지혜가 없다.
그래서 지혜는 어떤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지혜의 운동력 그 지혜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고정된 것을 원한다. 이유는 딱 하나이다.
인간은 땅에 박혀 있는 고정된 신이기 때문이다. 우상이다. 인간 자체가 우상이요 신이다.
이 우상이 아무리 이 땅에서 날고 기고 해도 그 뿌리와 근본은 땅에 속한 것이다.(교회가 왜 우상화 될 수 밖에 없는가? 수 많은 사람들이 우상화 되지 않도록 얼마나 수고와 열심을 내어도 모조리 다 실패한다. 우상화를 막을 길이 없다. 점점 더 땅 속으로 박혀버린다. 결국 묵시는 날라가 버리고 역사만 남아서 더욱더 악마의 터전이 된다.)


그래서 고정화 된다.


그러나 지혜란 날개를 달았다.
땅에 머물지 않는다. 포착 될 리가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엔 원수로 변한다.
묵시는 뒤죽박죽으로 역사 속에 고정화 된 것을 공격한다.
그것도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말이다.


가장 미약한 돌삐 하나가
떼구르르르 굴러 들어와서
엄청나게 크고 튼튼하고 높은 그 우상적인 마음을
철퍼덕 넘어뜨린다.


굴러들어온 돌맹이 하나가 박힌 돌이 아닌 박힌 성전을 무너뜨리는 식이다.


십자가는 어리석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는 철벽요새이다.
뭐든지 끌어 모아서 튼튼한 벽돌 재료로 삼아서 성벽의 확장과 발전과 팽창의 도구로 삼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무겁다. 땅에서 더욱더 깊이 뿌리 박는다.
가볍게 날 수가 없다.


맏아들은 그동안의 자신의 의로움이 바로 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땅에 뿌리는 박은 모습이다. 철벽요새인 의로움이다.


그러나 탕자는 가볍다. 툴툴 털어버린 삭제당해 버린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잃어버렸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그런 복잡하고 지치고 피곤한 무거운 짐은 이제 모조리 잃어버리고 삭제 당했다.


아버지에게 완전 차압당해버린 확정만 받을 뿐이다.


자기 것이 다 삭제 되었기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선악에 종지부를 찍었고
행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확히 형이 지적했다. 창기와 합한 몸이요 더러운 인간이며 구제불능이다. 종지부를 찍었으니 더 이상 나올 행함이란 없다.


아들이라는 칭호도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그저 종이면 족하다.


종 노예 개 미친놈 개새끼 마귀새끼 창기
무슨 욕을 먹어도 어떤 모욕을 해도


심지어 죽여도 상관 없는
누가 죽여도 할 말 없는 거기에 대한 어떤 반항 조차도 다 빼앗긴 몸이 되었다.
맞다 더러운 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로 이런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야 마귀에게서 빼 내는 방식인 십자가가 덮어줄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는 바로 마귀가 원하는 선악에 조건을 갖춘자.
율법에 의로운자. 법에 의로움을 갖춘자가 아니라.


바로 죄인 중의 괴수
쭉정이 중에 쭉정이
가라지 중에 가라지
염소 중에 염소
이방인 중에 개 같은 이방인
과부 중에 과부
고아 중에 고아
나그네 중에 나그네
문둥병자 중에 문둥병자이다.


1급 살인자 만들어서 선악에 그리고 율법에 법에 양심에 종지부를 찍힘 당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피의 가치성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미래에 준비된 피는 관심 없다.
창세전에 예정된 피 도 관심 없다.


오로지 현재의 깨끗한 자신의 신체에
왜 저런 창기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는 사건이 하필이면 자신의 주변에 일어났는가에만
짜쯩을 내고 안색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즉 죽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가인에게는 법이 덮쳤기에 법을 행하는 자아가 계속 있어야 합격 통지서를 받는데
합격 통지서를 받을려면 자아가 없으면 안되기에 죽음으로 드릴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과 합할 수가 없다.


방금 이런 소리 듣고 아 그럼 죽음으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행함으로 안다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또 안 된다.


개인적인 죽음이란 없다.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한 아벨의 죽음이지
그래서 더 나은 제사이지
사적인 죽음은 결국 행함이다.


다시 살아남도 즉 탕자에서 좋은 옷을 입힘 당하는 것도 사적인 패자부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용서를 보여주기 위한 십자가 희생 사랑의 확장이다.


그래서 자기 유익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십자가의 희생죽음의 확장이다.


탕자는 이 희생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전에 탕자가 되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도출하기 위해서 이용당하는 소모품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창세전의 노선이 없다.
그저 깨끗한 자신의 신체만 있을 뿐이고
그 신체 중심으로만 확장 할 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인자의 몸을 확장 시키신다.
탕자가 딱이다. 재격이다.


베드로를 반드시 세 번 부인토록 만드셔야 한다.
그 창조는 이미 닭의 노선으로써 베드로를 태우신다.


남들은 저주의 노선 죽음의 노선 좁은 노선이라고 한다.
아무도 그 길로 가서 살아 남거나 되돌아 온 적 없다고 한다.
구약으로 치면 물 속의 노선, 모래 속의 노선, 사막의 노선, 불 속의 노선,
물 없는 곳의 노선, 양식 없는 노선, 원망만 하는 노선이다.


그 원망 하나 하나 법궤에 담긴다.
그 배신 하나 하나 인자의 신체에 담긴다.


그리고 뚜껑이 덮혀진다.


베드로의 배신을 인자의 신체에 담아서
더 이상 어떤 누구도 송사 못하도록
베드로에게 배신당한 그 인자의 신체가 베드로 당사자의 허물을 덮어버린다.


더 이상의 더 나은 법
더 높은 법
더 센 법


없다.


베드로가 갈아 탄 그 배신의 노선이 알고보니 용서의 노선이요
오히려 그 노선을 타지 않는 자들은
지옥의 열차를 탄 것이다.


미래에서 내려온 동아줄은 닭의 노선이였다.


[무능하고] [할게 없고] [삭제 당하고] [잃어버림을 아는] 노선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할게 많았기에 거기에 따른 보상을 삭제 시킬수가 없다. 잃어버리기는커녕 창고를 더 짖고 용량을 늘려서 저장해야만 했다. 하드 메모리를 증설해서 기록하고 정리하고 엄청나게 많은 파일들을 하나 하나 일일이 기록하여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억하고 저장해야만 원금이라도 본전이라도 잃지않는 불안함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서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산 것이다. 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노선인가?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것을 저장하신다. 자신의 신체에 탕자를 담고자 했다.
자신의 사랑을 펼치고자 그 천하의 불효자식인 창기와 합한 우상숭배자요 개같은 이방인이 된 그 나쁜놈을 아버지는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그 위에 뚜껑을 덮어서
더 이상 허물치 않는 종지부 곧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어서
죄 값을 치르고 허물치 못하도록 다 덮어버렸다.


이 사랑을 보도록 하기위해서 종지부를 찍도록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종지부 이다.


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자 우리는 원치도 않는 십자가를 만나야 한다.


인생의 종지부이다.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만의 만남을 이루기 위한


종지부이다.


잃어버린 자식 찾아 삼만리
아빠 찾아 삼만리


두 만남의 종착역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꾀더냐?]
 

ps

김대식 2009/08/12 09:47



탕자를 경쟁자로 삼은 똑똑한 맏아들

참 희한하다. 탕자 곧 인생의 종지부를 찍어버린 제일 밑바닥 인간 마저도 반드시 꺽어서 승리를 쥐어야 하는 이 집착은 어디서 온 것일까?

왜 경쟁을 할려고 하고 이길려고 하고 그 속에서도 자기유익을 승리를 찾을려고 할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인데? (그래서 더 집요하게 집착한다. 당연히 이길줄 알았는데 아뿔사 걸림돌을 건드렸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서 드러난 사실은 십자가에 죽어가는 예수에게서 마저 우리 모든 인간은 승리감을 쟁취하고자 끝까지 그를 찌르고 죽일려는 살인의지를 표출했다.

이것이 인간 속에 감추어진 악마성이요 적개심이다.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끄집어내는 유일한 지혜이다.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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