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히브리서 3장입니다. 3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는 앞문장과 이제 나올 문장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럼 앞 문장을 봐야겠죠? 3장 1절의 앞은 2장 14절 이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들처럼 혈육에 함께 속하셨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고난을 직접 당했기 때문에 시험 받는 형제들을 능히 도울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뭐 어쩌란 말입니까? 외롭고 힘들 땐 그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직접 고난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시험 받는 우리들을 능히 도와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왜 시험을 받는 겁니까? 3장 1절을 보니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 시험의 이유가 됩니다. 거룩함이 시험의 이유가 된다는 말은 시험하는 자가 거룩한 것을 못마땅해 한다 의미입니다. 시험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입니다. 시험의 내용이 분명해 집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룩한 자들을 ‘너, 죽는다!’고 시험해 거룩함을 훼손하는 겁니다.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승리한 경기를 마음 조마조마 하면서 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당부하는 거죠. 이제 우리만 잘 하면 됩니다.
3장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만 잘 하면 됩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러면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마십시오. 우리만 잘 하면 됩니다. 잘못된다면 다 우리 탓입니다.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주장은 주님의 승리를 뭔가 부족한 승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생깁니다. 이런 구원은 주님과 우리의 합작품이며, 공동 소유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완전히 다른 결론을 만들어내는 갈림길입니다. “나는 00을 믿는 존재입니다.”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뭔가로 가득 채우는 본성 말입니다. 나라는 허깨비를, 보고 만질 수 있는 ‘진짜 구원받은 자’로 교환해 줄 수 있는 ‘행위’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시험받는 자=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오늘 성경을 읽고 있는 나’라는 공식을 그대로 밀고 나가서 얻는 것은 이제 나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결론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는 결론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사고방식이 그대로 작용된 거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아, 그렇습니다. 사라져 버립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라져 버립니다. 바람 같습니다. 온 곳도 간 곳도 우리에게 들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유되지 않습니다. 소유해서 구원받은 나를 생산하려던 우리의 모든 행위를, 믿음을 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구조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오늘날’은 바람 같은 날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한다고 모인 날이 아닙니다. 7절에 정확히 기록된 대로 성령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날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 중에 성령이 간섭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오늘날이라고 하지만, 그 날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날은 아예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지나간 탓에 오늘 없습니다.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탓에 오늘 없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없음과 미래의 없음 사이에 끼여 있는 없음의 틈일 뿐,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을 오늘로 만드시는 분은 오직 자신의 음성으로 우리를 강팍하게 만드시는 성령뿐입니다. 우리는 강팍한 우리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이 말씀이 오늘날도 잘 작동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경께서 오늘날을 만드셨다는 것을 강팍한 내 마음을 통해서, 죄를 통해서 인정하게 됩니다. 더불어 내 죄를 용서하고 계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를 철저하게 빼놓고 약속하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체가 된 이유는 인간 스스로 순종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령을 격노케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덜렁 있기만 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따집니다. 광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의미 있는 행위를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목이 타는 듯 해서 물을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모래를 먹을 수는 없기에 허기를 채울 떡을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죽음이 당연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면 물과 떡을 달라는 요구는 죄가 되는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모르면 살려달라는 본능은 죄일 뿐입니다.
성령이 십자가의 영인 것을 안다면, 성령의 출현 자체가 예수님의 몸을 찢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부터 약속하신 안식임을 안다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6절에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성전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할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끝까지 잡고자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깊이 생각하는 예수가 바로 마귀의 출력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기 무서워 나를 구원해 주는 예수를 만들었다고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미 승리하신 충성된 대제사장께서 나와 상관없이 영원한 의의 제사를 몸소 지내고 계시다는 사실만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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