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구원자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늘 같은 말, 늘 같은 결론이죠.
만나교회 앞을 지나치는 길에, 아이들에게 만나가 어떤 뜻인지 설명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정상입니다.
“맛없었겠다. 맨날 같은 음식이라니......”
복음이 그렇습니다. 맨날 십자가라니. 뭐 다른 거 없나, 뭐라도 좀 시키지, 뭐는 하지 말라고 하지. 늘 그 분이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영원까지 같은 일을 반복하신다니. 창조성이 이렇게 없어서야 어디 관객들이 몰려들겠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 살리려고 준 것이 아니듯, 복음은 우리 구원용이 아닙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성을 폭로하듯 복음은 우리의 악마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복음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밋밋합니다. 무미건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살을 찢고 피 범벅이 되어도 우리는 얼굴 하나 변하지 않습니다.
“뭐, 다른 거 없습니까?”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논리를 구성합니다. 이러저러한 성경말씀으로 장식합니다. 화룡점정, 마지막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마무리, 그래놓곤 복음이라고 우깁니다. 우기는 소리를 주님께서 듣고 계십니다. 여전히 십자가 위에서.
정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공감을 표시합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주장은 복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주장에 동의하는 나 역시 구원받겠지요? 그런 심사로 여기저기 안 다녀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모른다고 할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이건 또 뭐야?”
맞습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만큼 나를 무시하는 곳은 없더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죠. 피할 곳이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그 분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사실 맞죠.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나간 세상에서 살아남겠다는 인간이 제정신입니까? 그 속에서 구원받고 싶다는 심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구원 욕구이고 사욕이며 탐심이죠. 우상숭배자. 그게 바로 나죠.
나는 이럴 때 불쑥 튀어나옵니다. 탐심과 함께, 우상숭배와 함께, 죄인으로서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창세전에 십자가 사건을 예정하셨죠. 십자가 안을 준비하셨고, 그 안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 누군가 있겠지만, 복음은 ‘그 누군가가 바로 나 아닐까?’ 노리는 죄인의 눈앞에 십자가를 밝힙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냐고 돌직구를 던집니다. 구원받았는데 누가 날 구원하던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고 싶죠? 그게 바로 나죠.
복음은 항상 같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만 구원자라는 사실과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라는 사실 사이에서 복음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바람처럼.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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