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십자가’에 대한 설명
1.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사람이 지식은 무엇이든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집어넣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매일같이 새롭게 구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눈(snow)을 보았다면 ‘나는 눈을 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길에서 오토바이를 보았다면 ‘나는 오토바이를 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나는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가 됩니다. 이는 부활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접한 사람은 ‘나는 부활의 새생명으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었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나’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늘 윤리적 입장에서 심판하고 관찰하는) ‘나’를 따로 만들어서 그 두 개의 ‘나’ 사이를 조율하고 조정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열대 사람이 한국에 와서 눈(snow)을 보게 되면 ‘눈을 보게 된 나’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는 ‘나’가 따로 있는 겁니다. 이런 ‘나’를 가지고 ‘남’들에게 대표적 ‘나’로 나서게 됩니다. “나는 이번에 한국에 가서 눈(snow) 봤다. 너는 안 봤지?”라고 의시대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부활하신 예수님)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속의 ‘나’하고는 상대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하고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님하고 대화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이것을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교제’라고 하고 혹은 구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름과의 동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동행에서 왜 ‘죄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까? 그것은 구약 시절에 언약 안에서 동행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정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 33:3-6)
즉 이스라엘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입니다. 이 세상에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공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포 앞에서는 공포 같지도 않을 지경입니다. 인간들이 인간을 향하여 협박하고 공갈치고 위협하는 그 어떤 공포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느끼는 공포에 비하면 공포라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공포의 극한이 곧 자비와 사랑이요 긍휼의 내용이 됩니다. 이 공포를 취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포를 잠시 지나고 다시 옛날처럼 ‘십자가 아는 나’, ‘부활을 믿는 나’, ‘구원받은 나를 보고 즐거워하는 나’로 다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런 육적인 태도로 육적 본성을 발생시키는 나를 유일하게 십자가 지신 분으로 부활하신(=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그런 나를 십자가 안에서 죽여주면서 새롭게 ‘나’를 만들어 나가십니다. 전에는 ‘내’가 ‘나’를 감시하면서 나를 내가 늘 새롭게 만들어 나가던 시절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그런 육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나를 늘 죽이시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자비와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고 긍휼 안에는 더 이상 인간이 독자적으로 ‘내가 심판하는 나’, ‘내가 조율하는 내 인생’, ‘내가 다듬어가는 나만의 의로운 새생명 세계’ 같은 것이 들어설 수가 없게 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의 세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공포의 극한이 십자가에서 일어났고, 성도는 그 십자가 안으로 성령을 통해서 강제로 들어가게 하므로서 거룩이 안겨다 주는 공포로 인해 더 이상 그동안 지난 세월동안 자신이 자기를 다듬어 나가는 방식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겁내고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겁내었던 그 모든 것이 실은 악마의 술책이었음을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 쉽게 말해서 이제는 사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그 모습을 만날 밖으로 발현되는 모습은 바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는 고백의 연속입니다.
2.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님 안 계셔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척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자기가 자기를 다듬어 나가는 용도’로 십자가를 활용하게 됩니다.
(1)일단 이들은 주변의 사람들과 자기와의 차이남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라는 것을 ‘남’과의 차이남을 통해서 확립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인도네시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눈(snow)을 보고 온 사람이 생겼다면 졸지에 그 사람 빼놓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눈을 보지 못한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규정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의지간한 것은 다 가졌는데 눈(snow)은 직접 보지 못한 것이 흠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나’라고 규정짓는 요소 중에서는 항상 눈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 늘 마음이 걸린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규정지을 수 있다. ‘나는 눈을 보지 못한 인도네시아 사람!’ ‘바로 나는 이 규정에 해당되는 나다’” 라고 규정 내리게 됩니다.
(2)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자신도 한국에 와서 자신도 눈(snow)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나도 드디어 눈을 보게 된 인도네시아 사람이다”고 말입니다.
(3)이처럼 눈(snow)이라는 물질성을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눈을 보든지 아니 보든지 간에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구성했던 그 틀은 전혀 달라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추가적으로 자기 것이 된 것을 품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4)그런데 바로 이런 짓을 죄라고 규정하고 이런 죄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분으로 내왕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하게 되면, 이것은 눈(snow)이라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지난날에 자신이 자신을 대했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살해하게 만든 원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성했다는 진리의 전체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5)따라서 내왕하신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부활이나 천국이나 거루기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을 동원하는 모두 자기를 빛내고 영원불멸의 존재(악마가 배후에서 독하게 부축입니다. 너의 본성을 포기하지 말라고)로 탈바꿈하기 위한 갖은 행함과 행위를 동원하게 됩니다. 즉 “나도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눈(snow) 봤다. 나도 성도라고 인정해라!”고 주변사람에게 하소연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행위와 행함은 매일같이 십자가에 의해서 박살되는 사람이 곧 성도입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3. 십자가 비밀을 알고 난 다음에는 감사가 나오기 때문에 차라리 ‘감사하라’는 말도 ‘죄’라는 개념을 대신할 수는 없을까요?
밥을 많이 먹으면 방귀가 나오게 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방귀 뀌기 위해 밥 먹자!”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 된 것을 감사했다고 해서 십자가와 죄를 빼고 감사만 언급하게 되면 이 ‘감사’하는 자아에 대해서 또 다른 환상적인 자아가 그것을 지켜보면서 흐뭇해하면 이는 곧 두 개의 자아(나)를 상정하고 그 가운데서 조율하는 식으로 이상적(理想的)인 자아상으로 즐거워하겠다는 밖에 안 됩니다. 이게 불교이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해탈의 상태로 지켜보는(관찰하는) 또 다른 자아를 상정하는 육적 인간의 본래의 속성이 바로 이런 겁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교제하게 되면 극도의 공포 속에서(=사랑과 긍휼함과 자비 속에서) 그것이 육적인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본색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곧 우상이었던 겁니다.
4. 그렇다면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십자가는 믿고자 하는 자를 믿지 못하게 밀어내는 겁니다. 사람이 ‘믿고자 할 때’는 다 노림수가 있는데 그 노림수가 바로 ‘내가 원하는 나’를 내가 노력해서(=행함, 또는 행위) 얻어내고자 하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는 이래해서 십자가 알았다”고 주장하는 그 종교적 노력과 행함을 박살내는 십자가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인간 쪽에서 알아내는 방법은 없는 겁니다.
5. 그러는 당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너’와 ‘나’, ‘네 편’과 ‘내 편’ ‘네 사이트’와 ‘내 사이트’ ‘네 목사직’과 ‘내 목사직’ ‘네 교회’와 ‘내 교회’,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너의 역사’와 ‘나의 역사’, 이런 경계 잡기는 모두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소유해온 그 오물 더미에서나 나올 질문입니다. 십자가는 이 모두를 죄라고 규정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질문과 공격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이 찾아든 성도는 이 질문 자체가 ‘죄’요 악마의 술책이라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