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도님의 노트(5,6)-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
어느 성도님의 노트(5,6)-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
제5강
눈에 보이는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묵시안(예수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을 여시면서 서서히 강의에 모두들 몰입 되어 갑니다.
묵시안의 지배를 받아야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에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합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으로 해낼 수 없는 불가능이 계속 나오는 역할을 시킨다는 겁니다.
성도가 성령 받게 되면 나는 못합니다가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오직 모든 공로는 묵시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도록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사건에서도 주께서 하시고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목격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계속 하도록 하고요.
주를 증거해도 이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없는 것이 나오는데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 올 때 이것은 도저히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으며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는 고백과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살해 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불가능성이라는 그 열매는 자신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기에 성령의 열매라고 강조 하십니다.
사람들이 항상 역사적인 흔적을 통해서 성령을 받아서 묵시로 나아가야 되는데 묵시로 나아가지 못하고 역사에 머물고 만다는 겁니다.
역사적 인식에서 묵시적 인식으로의 전환은 성령밖에 안 되는 것이고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는 갭이 있는데 이 갭을 건너뛰어 넘게 하는 것은 성령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성령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된 바를 그대로 여기에 적용시키시며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이 갭을 건너올 수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 그것은 예수 안에 있을 때만 나타나는데 예수안 자체가 역사적으로 확인이 안 되는 묵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고요.
역사와 묵시가 만났을 때 또는 성령과 육이 만났을 때 육은 육대로 자기의 본색을 아주 여과 없이 잘 드러낸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사도바울은 그들을 사단으로 돌아갔다고 지적해 버립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이 놀랍게도 그것이 행함이었다는 겁니다.
예수안의 묵시적 모습들이 사단으로 돌아가는 그런 현상들을 유발시키면서 묵시적 현상이 드러나는 것이고요.
그래서 예수 안이라는 위력이 마지막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다는 종말론적 현상을 충분히 반영해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께서 명령하고 지시 내릴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내세운다면 결국 그 사람은 사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시와 명령이 왔을 때 인간이 해내지 못하고 성령께서 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엉뚱한 고백이 튀어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십자가의고백으로 튀어나올 때 이 사람은 지금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그냥 역사적 존재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이라는 묵시 안에서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는 겁니다.
이 고백 속에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되는 것이고요.
사도바울의 자리는 계속해서 예수 안이라는 자리입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자리가 예수 안의 자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떠난 자리는 사단이 지배하는 예수 밖의 자리라는 거지요.
그 자리는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자리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만나게 되면 역사는 자기위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수고롭게 했던 법적조항들을 가지고 맞서 싸우게 된다는 겁니다.
묵시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행함은 이것하고 항상 맞닥뜨리게 되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여전히 부활해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했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지고 주어진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복사판이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사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 때에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율법을 쥐고자 할 때 율법에 대한 행함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럴 때 율법은 그냥 죽어 있는 무생물이 됩니다.
죽어 있는 무생물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율법을 무생물로 보지 않고 마치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본다는 겁니다.
생명체로 보게 되면 우리가 율법을 지배하려고 손 내미는 그 이전에 먼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겁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율법이 우리의 주체에 압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주체의 수축현상 또는 응축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주체가 응축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면 법의 화살을 피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가운데 큰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들은 피하고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 것들은 지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응축된 주체를 유지할 수 있으나 나중에는 이 주체가 너무 딱딱해져서 자기도 도저히 감당을 못해버린다는 겁니다.
결국 응축된 주체가 나에게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되고요.
여기에 주께서 어떤 사태를 일으키시는데 말씀의 본뜻이 응축된 주체인 네가 이해하는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 모든 율법의 말씀 앞에서는 율법의 완성이 죽음이라고 합니다.
즉 피라는 겁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는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죽음이고 그 죽음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강조 하십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죄인인줄 안다고 할 때 응축된 주체가 깨지며 죄와 율법과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서 진리가운데서 비로소 자유함을 누린다는 겁니다.
이 자유는 응축된 주체에서 나오는 가능성이란 자유가 아닌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자유라면서 즐거운 5강을 마쳤습니다.
제6강
묵시적 존재(주님)가 덥쳐지면 누구나 죄인으로 고백 되어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계시가 되기 때문에 자기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당시에는 성경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도를 사용해서 계시의 범위를 고정시키는 중심축으로서 성경의 완료성으로 그렇게 했고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성령께서 완료된 성경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이 무생물이 아니고 생명체임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래의 사도중심축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그냥 내가 이것을 안다는 지식으로 머물러서 나를 응축하는데 보탬이 되는 성경지식정도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당시 사도에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되는구나 하고 그리스도 안 십자가중심으로 모아져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의 말씀을 지식에서 지식으로 머물면 안 된다는 거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을 몰랐는데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소급해서 몰랐던 시절까지의 내 상태를 마치 파도가 덮치듯이 한꺼번에 비로소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성령을 통해서 기쁨가운데 찬송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고요.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알고 십자가 피 흘리신 의미를 알았기에 말입니다.
당신의 운명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 났다는 라는 소식을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당신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당신의 행함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방법으로만 구원해서 그런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바로 천국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차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영이 씌워버리면 주는 나의 구주십니다라는 희한하고도 불가능한 고백들이 튀어 나오며 또한 엄청난 수모와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 가면서 계속 반복적으로 십자가복음을 외치면서 끝까지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복음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감당케 하는 것이고요.
성경에서 모든 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택하시고 은사를 받은 사람의 전부를 모든 이라 한다는 겁니다.
흩어져 있는 자녀를 모으는데 그 흩어진 자녀를 끌어 모아서 만든 하나일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이라는 겁니다.
구원해주신 한분이신 예수님의 행함만 생각하는 그러한 모임이 되는 모든 이라는 겁니다.
은사를 받아버리면 이것은 자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영원히 평안과 안정과 그리고 행복과 휴식을 그 안에서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라 예수 안에서 느끼는 기쁨이라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에서 싸우는데 무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기 없는 그 자체가 무기며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창녀는 창녀가 무기고 세리는 세리자체가 무기라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되었다는 그 자체로 악마를 이기는 무기가 된다는 거지요.
오직 주님의 행함으로만 구원됨을 내세운다는 겁니다.
결국 선한 싸움의 결말이 분류작업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랍니다.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에서 은혜와 십자가복음을 아십니까하고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 없이 행함으로 버티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장 1~2절에 그러므로 내가 높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여기서 높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이 말은 복음 전파하고 신앙생활 하는데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기죽을 필요가 없이 과감하게 굴하지 말고 단호하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만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2장 5~6절에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새 언약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멈추느냐 아니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것을 구원받는 사람의 그 심령에 집어넣는 것까지 새 언약에 포함되느냐 그 문제로 결정이 난다는 겁니다.
한분 때문에 구원 되었다는데 제발 그 한분의 자리에 네가 좀 끼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 중보자 한 분이면 된다는 것을 연사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2장 7절에 참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은 네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내 속에 들어있는 것과 차이가 나니까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겁니다.
즉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겁니다.
2장8~9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에서 이것은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 주신 은혜가 유지되는 상태를 말한다는 겁니다.
즉 이것은 나한테 너무나 넘칩니다.
감사함으로 입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담지 하라는 말이지요.
그저 있는 그대로 감사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복음의 기준이라는 것은 죄인에게 베푸신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으로 6강을 마쳤네요.